펌질좀고마해라
쩐다 | 2008-06-16 | 조회 2359
공공미술, 환상을 버려라
[미술칼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 때
2006-08-11 오전 10:39:18 [박응주 _ 미술평론가]
“그림 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 진술은 작가나 감상자라는 두 층위 모두에 걸쳐있는 진술이다. 첫째는 생산하는 자, 즉 작가의 측면에서 미술의 내적인 형식으로부터 미술을 둘러싼 담론적 문제로 이동한 최근의 ‘혼란’, 그 많은 담론상의 넓이를 다 배워낼 수 없는 피로감을 지칭한다. 둘째는 수용자, 감상자의 측면에서 이러한 담론적 문제로의 확장이 그간 소외되어왔던 장소나 관중들을 연관시킬 것이라는 숭고한 미학적 목표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미술의 정전들 속에서 유지되어온 ‘가치’의 문제마저 버려짐으로써 맞게 된 오리엔테이션의 불가능성을 말한다.
이 사태들의 그림이란 뭔가 ‘예술지식’이 표준화되는, 미적 감각이 합리화의 과정을 따라 ‘발전’해가면서 ‘지식’으로서의 더께를 한 켜 한 켜 덧입혀가고 있는 양상이라는, 어떤 그래프를 떠올리게 하는 바가 있다. 그 지식의 한 양식(형식)이 최근의 공공미술, ‘공공성’의 자명성이 아닐까 의심한다면 잘 못 짚은 걸까?
공공미술, 예술의 공공성 등의 말들이 미술촌에서 검색어 1위를 차지하고 있음은 이제 상식이 된지 오래이다. 미술전시 개최의 ‘사활적’ 결정력을 좌우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 정책들이나 경기문화재단, 또는 각 지자체급의 문화예술지원책에 있어서 공공성의 이데올로기는 공모지원서류의 문항들 곳곳에서 빛나고 있는 것이다.
‘전시(공연)의 목적 및 기획의도’를 기술하기를 요구하는 문항지는 ‘세부사업내용’을 지나 ‘사업계획의 특징이나 장점, 해당분야 예술발전가능성, 관객 등에게 미칠 좋은 영향’을 명기하도록 한다. 그것도 가급적 인적, 물적 ‘향수효과’를 수량화시키기까지 과학화 된다. 즉 기대효과가 수량화될 수 없는 ‘추상적 흔들림’, ‘오한처럼 떨림’과 같은 추상적(작가적) 가치들은 적을 란이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 기차에 탑승할 좌석은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기위해 또 하나의 일화를 겹쳐보기로 하자. 그것은 ‘아카데미즘’의 미술교육과 그 시스템이다. 미적 개념과 규격화된 규칙, 시험과 상벌제도를 통해 미적 감각을 합리화했던 근세 유럽의 살롱. 우리에게는 식민지하의 예술교육을 정초했던 조선미술전람회의 공모제도, 그리고 그 상부구조로서의 미술대학 체계의 역사가 그것이다. 요컨대 삶과 최대한 멀어지는 곳에, 색과 선, 형들의 조화로서의 자족적 가상이 미학적 목표의 최고였던 유토피아의 이데올로기가 ‘현실과의 흡착’을 문밖으로 내몰았던 폭력의 풍경이 완벽하게 겹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공공’은 지난날에 대한 어떤 복수(復讐)의 혐의로부터 썩 자유롭지는 못하게 된다. 그러나 이 트집성 진단과는 별개로 ‘진정한 공공’의 기원과 열망을 염원하는 측면에서 성찰해보아도 그것은 성공하지 못할 기획이다. 지금의 ‘공공’의 위험성은 단순히 역사적으로 앞섰던 아카데미즘에 뒤이어 위치한다는, 오해 사기 딱 좋을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 아닐지라도, ‘지금’이 논리적 정반합의 ‘합’의 단계라고 자의적으로 너무 빨리, 너무 쉽게 규정함으로써 저질러진 정당성의 횡포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사태를 약술해본다면 ‘최후의 발견’을 가장하는 공공성이라는 정언명령의 ‘말씀’앞에 자유로울 자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공은 이제 우리시대의 지식, 에피스테메가 되어있다. 여기서 잠깐 ‘인간과학’의 도식적 정의에 맞서 ‘인간학주의’를 타파하려했던 미셸 푸코를 경유해보자. 그는 한 시대의 언설적(言說的) 형성과 그의 변환에 대한 분석으로 이를 ‘지식의 고고학’으로 명명하여 우리 앞에 드러낸 바 있다. 하나의 언표를 다루되 그 언어의 형식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언표가 관계 맺고 있는 대상들, 즉 그 내용을 그 방계공간 속의 위치로서, 물질성의 기초위에서 정의함으로써 언표 속의 주체의 ‘말하는’ 위치를 명시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한 언설의 통일성은 그 대상의 단일성과 존속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다양한 대상들이 윤곽지어지고 계속해서 변환되는 공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비유로 치자면 우리에게 공공성이라는 언설의 집합은 60년대의 참여․순수논쟁에서 공리적 ‘참여’의 잠정적 승리라는 한 줄기의 수원(水源)으로부터, 또는 보다 멀리는 극심한 좌우 대립의 현대사의 서막을 찢고 피의 댓가로서 채택된 헌법전문으로부터, 가난해서 다툴 수밖에 없었던 내 집 울타리의 경계획정 싸움의 교훈으로부터도 왔다. 심지어 그것은 서사시(敍事詩)가 불가능하여 서정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목울대를 넘어가는 목메임에 대한 정서적 애상의 감정까지 포함하며, 김기창의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의 예수상이 전하는 종교적인 응용윤리학 또한 당당한 참석자다.
우리에게 공공성이라는 언설은 이토록 다양한 지표(index)들의 총합인 것이다. 공공성이라는 미학적 언설의 통일성은 이 상이한 대상들이 연결 접속되는 변환을, 시간 속에서의 그들의 비동일성을, 그들 안에서 야기되는 비약들을, 포괄해야 했다는 말일테다. 그것은 ‘어떤 인간’, ‘어떤 역사’에 대한 겸허함이다. 이육사와 김소월에게, 김수영과 서정주에게 고르게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공공성이라는 인식론적 문턱에서 이편과 저편을 생각하는 것, 성찰하는 것이다. 공공성이라는 언설이 ‘공공성’으로서 개별화되는 원리를 차단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공공적 복리의 인간학적 ‘애정’이 없는 기획들은 “다음기회에”로 탈락시키곤 하는 섣부른 합(合)의 천박한 강변이 설파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한다. 그것은 거의 무반성적인 통일성들이나 종합들에의 집착의 발로이다. 무수한 반(反)의 결들을 포섭하지 못하는 기계적 ‘합’으로서의 딱딱한 변증론인 것이다. 거기에서 ‘리얼리즘’은 세계를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옹졸한 변론이 된다.
요체는 공공성의 진실한 모습을 회복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것은 대립되는 전략들을 나타나게 해야 한다. 화해불가능한 관심에 자리를 마련해주고, 한 개념의 작동이 활동을 개시할 즈음 상이한 부분들이 활동하도록 하는 ‘전략적 가능성들의 장(場)’으로 툭 터야하는 것이다. 지리학적으로 잘 마름질된 대상들의 영토화된 영역이 아니라, 차라리 갈라져 쩍쩍 금가있는, “엉클어진 계열들, 차이의, 간극의, 치환의, 변환의 놀이들(푸코)”인 것이다.
인간 자체를 겸허하게 만드는 것, 그 불연속성의 파편적 사유인 회화를 생각하는 곳이 이곳이다. 그것은 물질로 환산되지 않는다. 공공미술은 그 비물질까지도 포함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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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응주는 홍익대 대학원 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고암학술논문상(2001)을 수상했으며, 독립기획자로서 ‘인천 미디어 아트 비엔날레展’(2003)과 ‘조국의 산하展’(2003, 2004), ‘5.18항쟁기념미술展’(2005)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편집 : [태윤미]
[미술칼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 때
2006-08-11 오전 10:39:18 [박응주 _ 미술평론가]
“그림 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 진술은 작가나 감상자라는 두 층위 모두에 걸쳐있는 진술이다. 첫째는 생산하는 자, 즉 작가의 측면에서 미술의 내적인 형식으로부터 미술을 둘러싼 담론적 문제로 이동한 최근의 ‘혼란’, 그 많은 담론상의 넓이를 다 배워낼 수 없는 피로감을 지칭한다. 둘째는 수용자, 감상자의 측면에서 이러한 담론적 문제로의 확장이 그간 소외되어왔던 장소나 관중들을 연관시킬 것이라는 숭고한 미학적 목표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미술의 정전들 속에서 유지되어온 ‘가치’의 문제마저 버려짐으로써 맞게 된 오리엔테이션의 불가능성을 말한다.
이 사태들의 그림이란 뭔가 ‘예술지식’이 표준화되는, 미적 감각이 합리화의 과정을 따라 ‘발전’해가면서 ‘지식’으로서의 더께를 한 켜 한 켜 덧입혀가고 있는 양상이라는, 어떤 그래프를 떠올리게 하는 바가 있다. 그 지식의 한 양식(형식)이 최근의 공공미술, ‘공공성’의 자명성이 아닐까 의심한다면 잘 못 짚은 걸까?
공공미술, 예술의 공공성 등의 말들이 미술촌에서 검색어 1위를 차지하고 있음은 이제 상식이 된지 오래이다. 미술전시 개최의 ‘사활적’ 결정력을 좌우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 정책들이나 경기문화재단, 또는 각 지자체급의 문화예술지원책에 있어서 공공성의 이데올로기는 공모지원서류의 문항들 곳곳에서 빛나고 있는 것이다.
‘전시(공연)의 목적 및 기획의도’를 기술하기를 요구하는 문항지는 ‘세부사업내용’을 지나 ‘사업계획의 특징이나 장점, 해당분야 예술발전가능성, 관객 등에게 미칠 좋은 영향’을 명기하도록 한다. 그것도 가급적 인적, 물적 ‘향수효과’를 수량화시키기까지 과학화 된다. 즉 기대효과가 수량화될 수 없는 ‘추상적 흔들림’, ‘오한처럼 떨림’과 같은 추상적(작가적) 가치들은 적을 란이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 기차에 탑승할 좌석은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기위해 또 하나의 일화를 겹쳐보기로 하자. 그것은 ‘아카데미즘’의 미술교육과 그 시스템이다. 미적 개념과 규격화된 규칙, 시험과 상벌제도를 통해 미적 감각을 합리화했던 근세 유럽의 살롱. 우리에게는 식민지하의 예술교육을 정초했던 조선미술전람회의 공모제도, 그리고 그 상부구조로서의 미술대학 체계의 역사가 그것이다. 요컨대 삶과 최대한 멀어지는 곳에, 색과 선, 형들의 조화로서의 자족적 가상이 미학적 목표의 최고였던 유토피아의 이데올로기가 ‘현실과의 흡착’을 문밖으로 내몰았던 폭력의 풍경이 완벽하게 겹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공공’은 지난날에 대한 어떤 복수(復讐)의 혐의로부터 썩 자유롭지는 못하게 된다. 그러나 이 트집성 진단과는 별개로 ‘진정한 공공’의 기원과 열망을 염원하는 측면에서 성찰해보아도 그것은 성공하지 못할 기획이다. 지금의 ‘공공’의 위험성은 단순히 역사적으로 앞섰던 아카데미즘에 뒤이어 위치한다는, 오해 사기 딱 좋을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 아닐지라도, ‘지금’이 논리적 정반합의 ‘합’의 단계라고 자의적으로 너무 빨리, 너무 쉽게 규정함으로써 저질러진 정당성의 횡포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사태를 약술해본다면 ‘최후의 발견’을 가장하는 공공성이라는 정언명령의 ‘말씀’앞에 자유로울 자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공은 이제 우리시대의 지식, 에피스테메가 되어있다. 여기서 잠깐 ‘인간과학’의 도식적 정의에 맞서 ‘인간학주의’를 타파하려했던 미셸 푸코를 경유해보자. 그는 한 시대의 언설적(言說的) 형성과 그의 변환에 대한 분석으로 이를 ‘지식의 고고학’으로 명명하여 우리 앞에 드러낸 바 있다. 하나의 언표를 다루되 그 언어의 형식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언표가 관계 맺고 있는 대상들, 즉 그 내용을 그 방계공간 속의 위치로서, 물질성의 기초위에서 정의함으로써 언표 속의 주체의 ‘말하는’ 위치를 명시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한 언설의 통일성은 그 대상의 단일성과 존속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다양한 대상들이 윤곽지어지고 계속해서 변환되는 공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비유로 치자면 우리에게 공공성이라는 언설의 집합은 60년대의 참여․순수논쟁에서 공리적 ‘참여’의 잠정적 승리라는 한 줄기의 수원(水源)으로부터, 또는 보다 멀리는 극심한 좌우 대립의 현대사의 서막을 찢고 피의 댓가로서 채택된 헌법전문으로부터, 가난해서 다툴 수밖에 없었던 내 집 울타리의 경계획정 싸움의 교훈으로부터도 왔다. 심지어 그것은 서사시(敍事詩)가 불가능하여 서정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목울대를 넘어가는 목메임에 대한 정서적 애상의 감정까지 포함하며, 김기창의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의 예수상이 전하는 종교적인 응용윤리학 또한 당당한 참석자다.
우리에게 공공성이라는 언설은 이토록 다양한 지표(index)들의 총합인 것이다. 공공성이라는 미학적 언설의 통일성은 이 상이한 대상들이 연결 접속되는 변환을, 시간 속에서의 그들의 비동일성을, 그들 안에서 야기되는 비약들을, 포괄해야 했다는 말일테다. 그것은 ‘어떤 인간’, ‘어떤 역사’에 대한 겸허함이다. 이육사와 김소월에게, 김수영과 서정주에게 고르게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공공성이라는 인식론적 문턱에서 이편과 저편을 생각하는 것, 성찰하는 것이다. 공공성이라는 언설이 ‘공공성’으로서 개별화되는 원리를 차단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공공적 복리의 인간학적 ‘애정’이 없는 기획들은 “다음기회에”로 탈락시키곤 하는 섣부른 합(合)의 천박한 강변이 설파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한다. 그것은 거의 무반성적인 통일성들이나 종합들에의 집착의 발로이다. 무수한 반(反)의 결들을 포섭하지 못하는 기계적 ‘합’으로서의 딱딱한 변증론인 것이다. 거기에서 ‘리얼리즘’은 세계를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옹졸한 변론이 된다.
요체는 공공성의 진실한 모습을 회복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것은 대립되는 전략들을 나타나게 해야 한다. 화해불가능한 관심에 자리를 마련해주고, 한 개념의 작동이 활동을 개시할 즈음 상이한 부분들이 활동하도록 하는 ‘전략적 가능성들의 장(場)’으로 툭 터야하는 것이다. 지리학적으로 잘 마름질된 대상들의 영토화된 영역이 아니라, 차라리 갈라져 쩍쩍 금가있는, “엉클어진 계열들, 차이의, 간극의, 치환의, 변환의 놀이들(푸코)”인 것이다.
인간 자체를 겸허하게 만드는 것, 그 불연속성의 파편적 사유인 회화를 생각하는 곳이 이곳이다. 그것은 물질로 환산되지 않는다. 공공미술은 그 비물질까지도 포함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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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응주는 홍익대 대학원 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고암학술논문상(2001)을 수상했으며, 독립기획자로서 ‘인천 미디어 아트 비엔날레展’(2003)과 ‘조국의 산하展’(2003, 2004), ‘5.18항쟁기념미술展’(2005)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편집 : [태윤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