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더

스킵 네비게이션


자유게시판

학예연구사 구보씨의 하루
미술관 | 2008-06-15 | 조회 3935
아마 여러 군데 소개했고, 또 솔자리마다 인용했었다. 또 자주 읽었지만, 아무리 반복해 읽어도 지루하지 않다. 재미(?)있으면서도 미술관, 학예사의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어 공감하는 바 크다.
이 글을 남길 당시가 20세기임에도, 21세기를 근 10여년을 지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동석이 지적한 미술관과 학예사의 현실과 환경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별로 변한 것 없이 제자리 걸음하는데, 글쓴이는 2004년 1월 서른아홉에 세상을 떠났다.

..................................
학예연구사 구보氏의 하루

이동석(미술평론,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사)


1.
142번 좌석버스가 하얏트 호텔 앞에서 꺾어질 때, 구보씨는 습관처럼 차창으로 고개를 돌린다. 멀리 해운대 바다 한 귀퉁이가 보였다가 시야에서 사라진다. 학예연구사 구보씨는 지금 미술관으로 출근 중이다. 일찍이 자타에 의해 '조직 부적응자'로 선고된 바 있는 구보씨는 아직도 출근시간이 어색하고 힘들다. 한 때, 인생 최고의 목표가 '게으른 삶'이었고, 그래서 구제가 불가능한 룸펜으로 낙인 찍혔던 구보씨였다.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학생들, 서둘러 택시를 잡는 바바리들을 구보씨는 무감동하게 바라본다. 1년 반 전만 해도 구보씨는 저 낯선 장면들이 자신과 영원히 무관할 줄 알았다.

그러면, 나는 왜 출근하고 있는가? 가끔 구보씨는 스스로에게 되묻기도 한다. ①부양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②제도권의 뜨뜻미지근한 온도가 좋아서. ③문화지향적 직업에 대한 자족감에서. ④개인적 꿈과 조직의 이상을 위해. 곰곰이 생각해도 해당사항이 없다. 아마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과 공포, 그리고 '白手'를 바라보는 이 사회의 싸늘한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것이 가장 솔직한 대답일지도 모르겠다.

수영비행장 사거리. 지금은 없어진 비행장의 이름이 아직도 남아있는 교차로에서 구보씨는 버스에서 내린다. 부산의 겨울도 너무 추워. 엄살이 심한 구보씨는 잔뜩 몸을 웅크리며 점퍼의 지프를 올린다. 한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는 날씨가 거의 없는 이곳 날씨를 서울보다 춥게 느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누구는 바람이 많이 불어서 그렇다고 하고, 누구는 대기의 습도가 높아서 그렇다고 한다.

점퍼에 코를 묻고 미술관 후문에 도착한 구보씨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는다. 고급커피와 일반커피가 똑같이 300원이다. 구보씨는 언제나 일반커피를 뽑는다. 아침 시간에 고급커피를 눌렀다가 뿌우연 물만 나오는 때가 있다. 커피가 나오는 동안 구보씨는 손목시계와 후문 현관을 번갈아 바라본다. 제복을 입은 청원경찰관이 몇몇 보이고 후문 출입구 위로 시민과 함께 하는 새부산 창조라는 견고딕의 글씨가 커다랗게 눈에 들어온다. 훌륭한 경구임은 분명한데, 초현대식 미술관에도 저런 간판식 구호를 어색하게 붙어야 하나? 후문 현관을 들어서면서 구보씨의 고민이 시작된다. 그래도 저게 미술관 정문에 안 붙은 게 어디야. 구보씨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다짐한다. '해답이 없는 문제는 문제 자체를 없애는 것이 상책이다.'

학예연구실은 1층 사무동 기다란 복도의 맨 구석에 있다. 수장고와 제일 가까운 방이지만 오전 내내 햇살 한 자락 스미지 않아 학예사들이 냉동고라고 부르는 방이다. 오늘도 구보씨는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했다.

아침에 출근하여 '다기능사무기기'(=컴퓨터)를 켤 때면 구보씨는 늘 네살박이 아들이 생각난다. 기억력이 나쁜 구보씨가 컴퓨터 비밀번호를 아들의 생일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부산과 서울에서 떨어져 생활하는 두 사람은 2주에 한번쯤 가족상봉을 한다. 구보씨도 언제나 밥떼기보다 애새기(끼)가 더 자주 보고 싶다. 9시 정각. 삐리리리. 전화가 온다.

"예에. 학예실 구봅니다."
"전시계덴요. 작품변경보고 빨리 안 넘겨줍니까?" 전시계에 근무하는 K여사다. 오늘도 하루가 이렇게 시작하는구나. 구보씨는 그 부지런함에 슬며시 짜증이 난다.
"아…, 거어…, 급한 겁니까?" 구보씨의 목소리가 괜히 느물거린다.
"급하건, 안 급하건 넘겨줄 건, 빨리 넘겨줘야지." 아침부터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아마 출근하자마자 한소리 들었나 보다.

같은 미술관 안에서도 관리과와 학예연구실은 공문을 주고받는다.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고 업무추진의 근거를 남기기 위해서 그렇다고 한다. 구두로 협의가 끝난 사안도 협조공문이 접수되어야 비로소 일이 시작된다. 실제로 서류만을 위한 서류, 절차만을 위한 절차도 많다. 면피용 서류와 감사 대비형 서류도 수두룩하다.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상황에서 서류로 일을 하는 것이 편할 때도 있지만, 구보씨는 체질적으로 공문을 만들기 싫어한다. 헛된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생각 탓이다. 그래서 30분이면 만들 공문도 미적거릴 때가 많다. '공무원은 서류로 말하고, 공무원은 죽어서 서류를 남긴다'는 말은 구보씨가 임용장을 받자마자 들은 말이다.

2.
최근 국공립 미술관의 운영에 대한 비판이 잦아지고 있지만 바깥에서 미술관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구보씨에게는 너무나 우아하고 아카데믹하게 들린다. 실제로 구보씨가 고민하는 것은 지극히 유치하고 사소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도록 원고에서 '오자(誤字)귀신'은 왜 안 떨어지는 것일까? 정보화 시대에 시외전화 통화기록부가 꼭 필요한 것일까?(그것도 규정에 있는 것일까?) 업무보고는 꼭 서류 형식을 갖추어야 하고, 기록 대장은 왜 그렇게 많아야 하는가? 요령은 분명히 늘어가는데 왜 일은 줄어들지 않는가? 학예사가 책상에서 책을 보는데 왜 자꾸 미안하고 죄스러워지는가? 우송되어 온 국공립 미술관의 브로슈어는 왜 그렇게 하나같이 촌스러운가? 역시 촌스러운 브로슈어를 발송할 때 쪽팔리는 느낌은 언제쯤 지워질까? 그런데, 사라진 망치와 타카는 어디로 갔을까?

구보씨는 자신이 연구직인지 행정직인지 헷갈리는데, 사람들은 학예실의 연구 업무가 전공별로, 영역별로, 연대별로 전문화가 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어떤 이는 학예연구사에게 전문성을 요구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전인적인 역할을 함께 주문한다. 그러나 실제로 학예사는 '잡예사'라는 자조적 별칭이 붙어 있을 만큼 '올 라운드 플레이어'로 생활한다. 연구자, 디자이너이자 디스플레이어, 출판·편집 전문가, 교육 담당자이자 소장품 기록가, 홍보 담당자 등등. 가히 '슈퍼 큐레이터'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한국에서 '아트 큐레이터'와 전문직원, 그리고 (준)전문 스텝 사이의 역할 분화가 안된 탓이다. 관리과 쪽의 편의적인 시각에 의하면 학예연구사는 필요할 때는 미술전문가이고, 떠넘길 때는 미술행정가이다.(그런데 그 전문가란 누구인가? 미술관 건축, 전시 조직과 전시 디자인, 그리고 미술관 운영을 막론하고 전문가다운 전문가가 한국에서 도대체 몇이나 있을까? 여기서 일반행정의 관점에서 분류되는 미술전문가는 '아마추어 작가'까지도 포함하는 범주이다.)

"구선생, 도록제작계획서 넘어갔나?" 공람철에 서명을 하고 있던 구보씨가 속으로 뜨끔한다.
"……"
"언제 넘어가나? 언제? 시간없데이. 시간." 강아무개 학예관의 급한 성질이 또 나온다. 학예실장 역할을 하는 강아무개 학예관은 성질도 급하지만 세상사에 못마땅한 것이 많아 '미술불평가'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원가 계산이 아직 안 끝나서……". 구보씨가 어물어물 둘러댄다.
"으응? 원가계산을 왜 구선생이 하나?"
"그럼, 누가 합니까?" 기가 막힌 구보씨가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음, 빨리 합시다. 빨리."

슬라이드 색분해의 조달청 단가가 32절 기준으로 장당 삼만천육백삼십원이고, 제판비가 10절 4도 기준으로 면당 이만팔천백육십8(팔)원(=5190*4*1.2)라는 사실을 학예연구사가 알 필요가 있을까? 업무 분장상으로 '미술자료와 출판에 관한 사항'이 학예연구실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좋다. 원가계산 자체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몇 군데 출판사에서 견적이 들어오면 미리 정해진 예산에 거꾸로 두들겨 맞추면 된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원가계산이 좋은 도록을 만드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도록제작 품위요구서를 작성하면서 구보씨의 고민이 또 시작된다.

가끔 구보씨는 자신이 미술관 전문직원인지, 일반 행정공무원인지 혼돈이 될 때가 있다. 학예연구사라는 공무원 직렬이 연구직인지, 행정직인지 헷갈리는 때도 많다. 차분히 자료를 조사하여 전시 개념을 가다듬고 전시의 섬세한 측면을 설계할 물리적 시간도, 정신적 여유도 없다. 아니 전시뿐만이 아니라 소장품, 교육 프로그램, 출판과 홍보 어느 것 하나 욕심대로 안 된다. 그럼 연구는 언제? 어떻게 하지? 학예사들은 입을 모아 자조적으로 말한다. 집에 가서, 열심히.

학예실에는 행정 인력이 없다. 당연히 사무보조 인력도 없다. 결국 전문성과 관련이 적은 일반적인 행정업무가 과도하게 학예실로 집중된다. 거기에 우편 발송 같은 잡무와 통상적인 현황보고 등 잔무들도 수북히 쌓여 있다. 수시로 일정을 체크하지 않으면 까맣게 잊어버리는 일들이 많다. 하루종일 바빴는데도 퇴근 무렵에는 머리 속이 텅 비며 무슨 일을 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없다. '미술불평가'는 일머리를 모른다고 타박하지만, 학예사들은 '뮤지엄 바이러스'가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코디네이터형 큐레이터'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공립미술관에서 전문화된 업무와 일반행정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조화와 양립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훌륭한 공무원이 된다는 것은 좋은 학예사가 될 수 없고, 좋은 큐레이터는 훌륭한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합리적인 업무 분장으로 해소될 문제가 아니다. 전시 추진을 행정적으로 지원해줄 전문 코디네이터가 없고, 미술관의 섬세한 업무를 분장하여 담당할 (준)전문 스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순환보직을 원칙으로 하는 일반 행정직 공무원들에게 전문 코디네이터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아스팔트에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예연구사가 행정에 통달하면서도 전문성을 살리는 것은 "임신한 낙타가 사지를 펴고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보다 힘들다."

예술행정 전문인력, 혹은 코디네이터의 부재만이 학예실의 업무 부하를 가중시키는 것이 아니다. 미술관 필수 인력으로서 외국미술관의 직제에서 일반화된 준전문 스텝(출판·편집 전문가, 디자이너, 디스플레이어, 홍보전문가, 포토그래퍼 등)들이 상근직으로 충원되어 있는 국내 미술관은 거의 없다. 결국 여기에 관련된 수많은 업무들은 고스란히 학예연구사의 몫으로 돌아오고, '아트 큐레이터'(Art Curator)의 핵심 업무인 기획과 조사·연구는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고 하여 '집에나 가서' 하는 개인적인 일로 치부 당한다. 상근 인력이 충원할 수 없는 현실 여건이라면, 당연히 '아웃 소싱'의 형태로 업무 영역이 분화되어야 하지만 국공립미술관의 여건은 이마저 힘들다. 고품위의 도록이, 깔끔한 브로슈어가 만들어 질 리도, 탁월한 디스플레이가, 전문적인 홍보가 될 리가 없다. 기적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문제점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해결 방안은 아무도 모른다. 구보씨 미술관의 학예사들이 제일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체계가 잡힌 박물관에서 연구·조사만 하는 학예사들이다. 구보씨 미술관의 학예사들이 전시의 기획·추진·집행을 떠맡아 고생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다. 전문성이 없는 일반 행정직이 전시 진행을 하는 것보다 행정이 서툰 학예사가 전시를 추진하는 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좋은 전시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학예실과 관리과로 이원화된 직제에서 단위업무를 기획과 집행으로 분리하는 것도 무리가 많다. 그럴 경우 협조 공문 주고받다가 세월 다 간다. 그러다 보니 자꾸 학예실로 업무가 밀려온다. 요령은 늘어가는데 일을 줄어들지 않고, 연구·조사·기획은 늘 뒷전이다. 학예연구실에 행정인력을 보강해야 한다고 구보씨는 목소리를 높여 보지만 별로 반향이 없다. 오히려, 수도권에 있는 모 미술관처럼 관리과에 학예연구사를 파견해야 한다는 뒤숭숭한 이야기가 대답처럼 들려온다.

3.
구보씨가 미술관에 첫 출근을 한 날은 미술관 건축현장에 있던 콘테이너 사무실을 이전하는 날이었다.(아. 그때는 미술관 개관기획단이라고 불렀다.) 골조만 올라간 미술관 건물, 흙먼지가 풀풀 날리고 가설전등이 설치된 지하 한 귀퉁이에서 구보씨는 근무를 시작했다. 사사건건 부딪히고, 시시각각 마찰하면서도 그 때는 해보겠다는 의욕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장기전을 하겠다는 각오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리한 일정에, 무모한 계획으로 갑절의 고생을 자초했지만 그 때는 약속한 일을 해야 된다는 긴장감이 있었다.

'잔 펀치를 너무 허용한 것일까? 아니면 체력 안배에 실패한 탓일까?' 요즘 구보씨는 답답하고 갑갑하다. 점점 전의가 사라지고 턱없이 무기력해지는 느낌이다. 어떤 땐 자꾸 냉소적으로 변해 가는 자신이 밉다. 재충전이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가 조금씩 소진되어 간다는 느낌은 정말 싫다. 생활에 리듬을 타야 한다고 구보씨는 끊임없이 생각하지만 반복되어 불거지는 문제들이, 부대끼는 일상이 감정을 허황하게 이완시킬 뿐이다. 드물게 주체하기 힘든 분노가 느닷없이 치밀기도 한다. 여기, 내 청춘의 막바지가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하고 억울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문제 해결에 시간이 필요하다거나 문화인식이 개선이 되면 여건이 호전될 것이라는 말들을 구보씨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구보씨는 그런 말을 들을 때, 현실도 모르고 영양가도 없는 소리라고 한마디로 일축해 버리기도 한다. 시간이야 김구 선생님이 독립국가의 문화입국을 외친 이후로 충분히 흘렀고, 문화인식의 부재에 대한 질타도 식상함을 넘어 수사적 상투어가 되어 버린 것이 우리의 문화현실이 아닌가?

아, 어디론가 멀리멀리 떠나가고 싶구나. 구보씨는 요즘 머리 속이 복잡하다. 월급쟁이의 멘탈리티를 과격하게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과 공무원이라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직업, 그 특유의 느슨한 관성에 안주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 하기는 다른 곳이라 해도 형편이 나아 보이지는 않는다. 공, 사립 미술관, 갤러리와 문화재단 할 것 없이 여기저기서 곡소리만 들려온다. 오히려 여기는 사정이 훨씬 나은 편이다. 정상적인 전시가 가능하고 상대적으로 학예연구실의 근무 여건 자체도 나쁘지 않다. 구보씨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 춥고 배고픈 미술판에 IMF라는 삭풍이 불고 있는데 내가 가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구보씨의 제일 큰 고민은 미술관의 전문화된 업무와 일반행정의 절차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이다. 그 괴리가 사람을 부대끼게 만들고 정신을 지치게 한다. 흔히 하는 이야기이지만 전문화된 문화업무와 일반행정은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이념이 틀리고 서로 지향하는 목표도 다르다. 큐레이팅이 전문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의 문제라면 행정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절차의 적용이다. 전시기획이 악착같이 최선의 결과를 의식한다면, 일반 행정은 철저하게 공평무사한 절차에 집착한다.

큐레이터와 행정관료는 추구하는 이상도, 삶의 자세도, 사고 방식도, 세계관도 서로 틀리다. 큐레이터가 끊임없이 변화를 희구한다면 행정관료는 완강하게 안정을 추구한다. 큐레이터가 현실거부형이라면 행정관료는 미래대책형이다. 사실 양자간의 갈등과 의견차이는 필연적이고, 이질적 세계관이 마찰하기 시작하면 최소한의 팀웍도 맞추기 힘들다. 문제는 이러한 괴리와 간극을 메우고 보완할 제도적 장치나 조직 구성이 힘들다는 것이다.

큐레이팅이 그렇지만 전시진행 역시 선택의 연속이다. 절차의 유연성이 확보되지 못한 상황에서 차선의 선택이 강요되고, 차선의 선택이 누적될 때 나오는 결과는 언제나 참담하다. 예산기획과 집행의 경직성, 그리고 행정절차의 복잡성은 '최고의 선택'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물론 공무원 일반회계 규정을 적용하는 엄격한 예산기획과 집행 자체가 문제점이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문제는 끊임없이 가변하는 상황에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전문 업무에 그 경직된 원칙과 절차가 적용된다는 점이다. 전시 추진의 순발력과 유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국공립 미술관의 전시가 패턴화되거나 개념이 느슨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어떤 때 구보씨는 새로운 일을 만드는 것이 두렵다. 몸을, 감각을, 정신을 경직된 규정과 관례로 굳어진 절차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4.
점심을 먹고 오는 구보씨에게 낯선 사람이 명함을 건넨다. ○○당 인쇄소. 생산부장이라 적혀 있다. 구보씨가 맡고 있는 전시의 도록 제작업체로 계약된 모양이다. 명함 디자인을 꼼꼼히 바라보던 구보씨의 예감이 웬지 불길하다.

"전시 카달로그는 좀 만들어 보셨습니까?" 구보씨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 화보집은 좀 했습니다." 당황스럽고, 황당해 지는 순간이다.

화보? 華報? 花譜? 이번에도 고생 푸짐하게 하게 생겼네. 구보씨는 속으로 혀를 찬다. 계약 부서인 회계 담당은 업체의 도록 제작 수준에는 관심이 없다. 보통 인쇄업 협동조합의 추천을 받아 지역의 고만고만한 업체들과 돌아가며 계약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이 계약을 하는 회계 담당자로서는 관례이고 제일 공평무사한 방법으로 믿는 것이다. 발주처 선정과 계약 업무가 회계담당으로 단일화된 현실은 어쩔 수 없으니까 좋다. 그러나 대신 도록의 질을 평균으로라도 유지시키고, 짧은 납품 일정을 맞추느라 학예사들만 죽어난다. 네 번, 다섯 번 색분해는 기본이고, 전시도록 제작 경험이 없는 업자에게 하나하나 설명하고 가르치며 작업을 진행할 때도 있다. 도판 규격과 위치, 표지 디자인과 글자 모양·포인트까지 지정해 주어야 하는 그 작업은 곤혹스럽고도 대단한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좋은 도록이 나올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래도 미술관이 부산의 인쇄문화를 10년은 진보시킬 것이라는 기대 섞인 관측도 있다.

구보씨는 미국 모 미술관의 아무개 큐레이터가 3년 동안 다섯 개의 전시를 개막시켰다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잡지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구보씨는 올해에 세 개의 전시를 전담하여 추진하고 두 개의 전시를 지원하기로 되어 있다.(나는 일년에 다섯 개의 전시를 오픈시킨다?) 허지만 이건 자랑이 될 수 없음을 구보씨는 너무나 잘 안다.

구보씨가 근무하는 미술관은 실제로 세계적인 규모와 최첨단의 시설을 자랑하는 미술관이다. 건축비만 3백 수십억에 이르는, 말 그대로 초대형 미술관이다.(참고로 뉴욕 MOMA이후 미국에서 개관한 최대 규모의 현대미술관이라는 샌프란시스코 MOMA의 건축비가 93년을 기준으로 500억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전시장 14실에 1400평에 이르는 실내 전시공간은 400여평짜리 대형 기획전시가 3개가 동시에 개막해야 겨우 메꾸어 진다. 그래서 올해에 12개의 기획전시와 4개의 소장품전, 기증품전이 예정되어 있다.(미술관학 입문서를 보면 연중 2-3개의 기획전이 적절하다고 쓰여 있다.) 이건 전시를 조직한다기보다 전시에 치여서 떠밀려가는 실정이다. 이래서 작품에 대한 애정을, 전시에 대한 집중력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물론 소장품이 부족하여 상설전시가 불가능한 미술관 현실도 그렇고, 미술문화 인프라가 부재했던 지역 미술계의 기대도 구보씨는 이해한다. 전시 예산의 비율은 미비하지만 잔뜩 축소된 미술관 예산을 방어해야 하는 입장도 이해한다.

하나의 전시가 구색만 갖추는 데에도 얼마나 섬세하고 많은 일이 필요한 지 아는 사람은 안다. 일반행정 회계규정에 맞추어 예산을 집행하는 과정이 얼마나 까다롭고 복잡한지도 아는 사람은 안다. 일단 전시 하나를 전담하면 세부계획 수립에서부터 작가 섭외와 작품 연구, 도록의 편집·교정, 전시장 조성과 디스플레이, 홍보 업무까지 일괄하여 학예사 혼자서 추진해야 한다. 학예실에서 안이 나오지 않으면 브로슈어 한 장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시를 개막하면 끝인가? 전시 하나가 개막한 후에도 그 전시에 따라오는 잔무는 얼마나 많은가?

그 사이에 내년 전시의 기본 기획안을 수립하고 예산 편성작업까지 끝내야 한다. 그것뿐인가? 구보씨는 올해 전문인 교육 프로그램으로 인턴쉽을 도입하고 이를 연중 운영해야 한다. 그것만이랴. 소장품 구입 업무를 지원해야 하고, 작품 기증업무를 전담해야 한다. 거기서 짬짬이 시간을 내어 정기 감사 준비도 해야 하고 연보 발간 준비도 해야 한다. 구보씨는 쓰러질까 두렵다.(실제로 개관기획단 시절, 젊은 주사 한 분은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다. 식물인간 상태에서 기적처럼 깨어났지만 복직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한다.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 분의 꿈은 제대로 된 사회교육 프로그램의 운용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구보씨가 힘든 것은 업무가 과중한 것보다 미술관의 전체 구성원이 팀웍을 맞추어 일할 수 없는 분위기가 더 힘들다. 끊임없이 삐걱거리는 일상에서 오는 짜증, 수면 하에 지속되는 신경전과 가시 돋친 대화들, 삶의 목표와 추구하는 이념이 다른 사람들이 부대낄 때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미술관과 같은 섬세한 조직에서 구성원의 자율성도 중요하지만 기계처럼 작동되는 팀웍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학예사의 ×고집과 행정인력의 ×곤조가 정면으로 부딪힐 때, 팀웍은 커녕 서로 멱살을 잡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구보씨도 무던히도 싸웠다. 싸우면서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고 이해도 했지만, 지우기 힘든 앙금도 쌓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더 이상 세계관이 틀린 사람들과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싶지도 않다. 싸워봤자 잃는 것은 가냘프던 팀웍이요, 얻는 것은 황폐화되는 인간성이다. 구조와 사람, 제도와 문화인식의 문제가 상층과 하부, 전후와 좌우로 뒤얽혀 있는데, 사람이 정치력으로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있다. 설령 가능하더라도 그것은 부분적인 범위 내에서 일시적인 해결일 뿐이고 문제는 계속되어 불거지게 마련이다. 고민하지 말자. 구보씨는 스스로 다짐한다. 해답이 없는 문제는 문제 자체를 없애는 수밖에 없다.

5.
해도, 일이 생각대로 안될 때 구보씨는 속이 상한다. 자신의 능력에 회의가 올 때도 있다. 엄청난 하드웨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소프트웨어와 삐걱거리는 오퍼레이팅을 생각하면 자신의 역할에 대해 자괴감이 들 때도 있다. 그래도 끊임없이 구보씨는 스스로에게 암시를 하는 편이다. 구조와 여건을 탓해서는 안 된다. 미술관 운영의 잘잘못을 학예사가 회피하기 시작하면, 상황은 삽시간에 최악으로 빠져든다. 미술관의 성공과 실패는 학예사의 자질과 개성에 좌우되고 "우수한 학예원을 보유하고 있다면 비록 약점과 결점이 있는 미술관이라 하더라도 결코 형편없는 미술관이 될 수 없다"는 오래된 경구를 아직도 구보씨는 신봉하는 것이다.(불쌍하게도.)

미술관의 위상을 세우는 데에 관장의 일관된 의지와 역할은 절대적이다. 내부적인 장악력과 대외적인 방어력을 갖춘 관장의 의지는 좋은 큐레이터를 탄생시키는 토양이자 생명수와 같은 것이다. 학예실의 정점에서 관장은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여 구성원의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 그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큐레이터가 좋은 미술관을 만드는 것이다. 학예연구사를 잡직 연구사라고 생각하는 행정관료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미술관에서 학예연구사가 프라이드를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 자부심은 자신의 자질과 역할에 대한 부단한 반성이 전제가 되어야 하고 미래에 자신을 투자가 각오가 되어 있을 때 확보될 수 있다.

그러면, 큐레이터에게 가장 요구되는 자질은 무엇일까? 혹자는 체계적인 교육에 의한 광범한 미술사적 지식을 이야기하고, 혹자는 창의적인 기획력과 폭넓은 교섭력을 말한다. 누구는 미술문화 전반에 대한 종합적 분석력과 좋은 작품을 판별하는 감식안을 이야기하고, 또 누구는 광범한 정보력과 행동파적 추진력을 이야기한다. 구보씨는 한국의 큐레이터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한계 상황에서도 끝까지 최선을 찾아가는 근성과 잡다한 스트레스를 견디는 내성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는 큐레이팅을 '앎의 여행'이라고 했다. 어느 큐레이터는 삶의 리얼리티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비전을 시각적 감동으로 묶어내는 일이라고 했다. 그 일은 본능적인 감각과 기나긴 인내가 필요하며, 학자적인 자세와 실천가적 근성이 함께 요구된다고 한다. 한국의 현실은 전시를 일정에 맞추어 내는 요령과 적당한 선에서의 적절한 타협, 그리고 전시에 대한 애정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끊임없는 자기최면이 필요하다고 구보씨는 생각한다.

공무원 조직은 위계를 존중하고 상명하복을 생명으로 한다. 그래서인지 합리적인 토론이 거의 없고 수평적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이 관료문화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모든 것이 자율이나 소신보다 지시와 지침에 의해 처리된다. 구보씨의 미술관에도 '걸어다니는 규정집'이 많다. 절차와 판단이 규정에 적절한지는 철저히 검증된다. 구보씨가 보기에 문제는 그 규정과 지침의 경직된 해석에 있다. 감사를 의식하여 끊임없이 위축되어 해석되는 규정은 더 이상 합리적인 절차를 위한 객관적 원칙이 아니다. 전례는 끝없이 답습되고 효율은 한없이 저하되기 마련이다.
외부의 비판에 극도로 민감한 반면, 내부 비판은 애써 감추려는 경향도 관료 사회의 특성이다. 구보씨가 생각하기에 내부의 비판을 덮어버리고 자체의 문제점을 도출하지 못하는 조직은 발전을 기약할 수 없는 죽은 조직이다.

이른바 행정관료들은 문화행정의 속성상 파트너쉽을 필요로 하지만 전문가의 전문적인 판단을 존중하지 않는 모순적인 풍토가 분명히 남아 있다. 실제로 위에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대전제가 있어도 실무 조직에서 전문가의 판단이 무시되거나 왜곡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전문가의 판단이 존중되지 않는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지원은 잉여재원의 낭비적 시혜일 뿐이라고 구보씨는 생각한다. 단지 베푸는 것에 장기적인 전략이, 가치 지향적 원칙이 있을 리 없는 것이다.

구보씨가 공무원 사회에서 처음으로 받은 인상도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느낌이었다. 원칙적으로 일반행정은 철저한 사전계획과 그 계획의 완벽한 수행을 목표로 한다. 한 번 계획된 일은 예산삭감 등 돌발 변수가 없는 한 어김없이 완수되어야 한다. 행정 공무원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그 추진과정이 변경되는 것이다. 절차의 변경이란 곧 잘못된 사전계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시와 같은 문화사업은 시시각각 상황이 변화하기 마련이며 그 가변적 상황에 탄력적인 대응은 필수적이다. 단 한가지 예로 외국 미술관의 경우, 전시의 마지막 단계인 실제 디스플레이 과정에서 도상계획과 느낌이 다른 작품을 작가와 큐레이터의 합의하에 교체하는 사례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6.
미술관이 '문화의 무덤' 혹은 '작품의 감옥'으로 비판받기 시작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미술관이 등장하는 바로 그 시점부터이다. 미술관이 무덤이고 감옥이라면 큐레이터는 묘지기 혹은 간수장일 것이다. 이는 미술관의 배타적 권위에 대한 야유라기보다 미술관이 작품을, 그것이 생산되고 일상적으로 관계 맺는 삶의 맥락으로부터 격리시킨다는 사실에 대한 비판이었다고 구보씨는 읽었다. 구보씨도 그 의미에 감동하고, 동감한다. 실제로 그 말의 맥락에 관심이 없더라도, 가끔 구보씨처럼 숙직실에서 잠들며 캄캄하고 텅 빈 전시장에서 줄을 지어 걸려 있을 작품들을 상상해 본 사림은 '감옥이나 무덤'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적절한 비유인지 실감할 것이다.(감옥은 얼마나 은밀하고, 무덤은 얼마나 경건한가.)

아방가르드의 역사가 미술관으로 대표되는 제도적 권위에 대한 저항과 전복의 행로였다면, 미술관도 그 거센 비판에 경탄할 만한 유연성과 포용력을 보여주며 스스로의 제도적 권위를 보존해 왔다. 구보씨는 막말로 해서 미술관이 작품에 도장을 찍어주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부드럽게 말해서 미술관은 작품을 제도화시키거나 이미 제도화되어버린 작품의 권위를 공고히 해주는 곳이다. 그 신격화된 공간에서 수동적인 오브제로 남은 작품들을 사람들은 경배한다. 누구는 도취되기도 하고, 누구는 예시를 얻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구보씨가 알기로, 한국에서 이처럼 성역화된 미술관은 없다. 한국의 미술관은 외부의 온갖 기대와 정치적 이해 관계가 마지막으로 몰려드는 곳이다. 복잡한 이해가 뒤얽혀 있는 미술관은 지끈거리는 우리 현실의 겉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래서 전문적인 판단이 왕왕 실체가 없는 명분에 의해 무시되거나 훼손되기도 한다. 기획전과 소장품 구입을 둘러싸고 지역의 이기적인 요구들이 민원과 진정의 형식으로 느닷없이 표출되기도 한다. 구보씨는 답답하다. 진보적 기획이나 의지를 갖고 시작한 일이 비난의 대상이 된다면, 미술관이 고착된 지역성을 넘어선 위상을 어떻게 확보할 것이며, 지역 미술의 탈(脫)주변화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러한 이기적 이해와 비합리적 요구들은 하나의 문화적 환경으로서 미술관의 입지를 뿌리부터 흔드는 현실적인 장애 요인들이다.

구보씨는 IMF라는 미증유의 위기가 제한된 경제자원의 불균형적인 분배에서 시작된 것처럼, 한정된 문화 재원의 비효율적인 운용은 문화적 위기를 부르고, 미술제도적 환경을 황폐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프트웨어에 대한 투자 없이 경직되게 운용되는 거대 하드웨어는 오히려 미술문화의 다면적, 다층위적 양상을 위축시키고 억압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IMF가 변화에 취약한 경직된 사회 구조가 돌연한 외부충격에 연쇄적으로 균열된 결과였다면, 그 위기의 징후를 파악하고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은 확산적 사고, 곧 문화적 사고의 결핍이었다. 마찬가지로 미술관과 미술계에 남아 있는 비문화적 양상들은 정체와 퇴행을 넘어 미술계의 파국을 불러들일 수 있는 잠재적 위기 요소들이다.

오래 동안 한국의 미술계는 세련된 논쟁이나 섬세한 토론보다 복잡한 게임의 판도에 좌우되어 왔다고 구보씨는 생각한다. 지금까지 단순, 무식, 과감하게 밀어붙이면 어쨌든 그 결과는 '마이너스'보다 '플러스'가 많았다. 하나의 판도가 또 하나의 판도로 대체될 뿐인 이러한 양상은 부질없는 에너지 소모와 내부출혈로 인해 진정한 변화도, 진정한 발전을 기약하기 힘들다. 한국에서 미술관 문화가 태동하는 지금 시점에서, 미술계의 이러한 시대착오적 풍토는 미술관의 미래에 드리위진 짙은 그늘이다.

구보씨는 더 늦기 전에 동시대 한국의 현실에 적실하고 미래지향적인 미술관 모델이 다양하게 제안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서구 모델의 이상적 조합이나 서구 제도의 선택적 참조로는 결코 성취될 수 없을 것이다. 19세기형 박물관에서나 요구되는 원론적 기준으로 21세기의 미술관을 구축하려는 일부의 발상도 구보씨는 우려스럽다. 장구한 시기에 걸쳐 거대 자본과 수많은 전문 인력이 투입되어 형성된 서구의 미술관이 안정된 시스템과 우수한 기능을 지닌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역으로 그것은 지금 시점에서 가장 변화를 요구받는 모델일 수 있는 것이다. 미술관은 하나의 유동적인 문화 환경이지만 극도로 보수적이고 안정적 운용을 지향하는 제도적 기관이다. 일단 시스템이 정착되어 제도화된 관성이 생기면 새로운 실험이 불가능하거나 조그만 변화에도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게 된다. 서구 모델을 전범으로 미술관 문화를 일구어 온 일본이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서구의 기준에 의해 비판받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최근 광역지자체에서 공립 미술관의 설립이 경쟁적으로 검토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T광역시에서 추진하는 시립미술관도 P시립미술관을 의식하는 규모로 알려져 있다. 구보씨는 도시락을 싸들고 가서 부탁하고, 사정하고, 설득하고 싶다. 초대형 미술관을 의식하지 말고 중소규모의 특성화된 미술관을 시내 도처에 설립하여 하나의 네트워크로 엮어서 운용하라고. 재원이 있으면 하드웨어가 아니라 먼저 그 네트워크의 에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에 투자하라고. 계획의 입안부터 실행의 모든 단계에 걸쳐 소수의 정예화된 전문가 집단에게 책임 있는 역할을 부여하라고. 장기적 비전을 세우고 다양한 방식의 운영 사례를 검토하라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되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때 계획변경을 주저하지 말고, 추진절차에도 유연성을 가지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발, 서두르지 말라고.

7.
오늘은 목요일. 학예사들이 싫어하는 주간업무보고를 쓰는 날이다. 퇴근시간이 가까워 오자 모두들 '다기능사무기기' 앞에 붙어서 업무보고를 쓴다. '이것도 지겨워' 학예사 A가 독백처럼 말한다. '지겹다고 말하는 것도 너무 지겨워', 구보씨가 말을 받는다. 구보씨는 오늘도 미술교사에게 보낼 초청장의 발송 주체를 놓고 관리과와 입씨름을 하였고, 슬라이드 촬영용 카메라 한 대 없는 미술관을 위해 카메라를 구입하려고 무진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업무보고에 쓰여질 수도, 쓰여져서도 안 된다.

"구보, 요즘 집에 가서 연구 좀 하나?" 오늘 당직인 학예사 S가 퇴근을 준비하는 구보씨에게 묻는다. 연구? 물론 자조 섞인 농담이다.
"아니, 대신 시집이나, 소설을 읽지."
"누구 꺼?"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그러믄 연구는 언제 하냐?"
"응. 그래도 심리적 보상이라도 돼."
"구보, 우리는 언제쯤 연구하는 연구사가 될 수 있을까?"
"달나라 미술관에 가서 알아봐라. 담배나 줘."
"구보, 담배 좀 줄여."
"내비두어. 나 그냥 이렇게 살다 장렬하게 전사할래."
"죽지마, 구보."

주간업무보고를 넘기고, 책상과 캐비넷을 꼭꼭 잠그고, 보안점검부에 서명을 한 구보씨는 미술관을 나선다. 바람이 분다. 부산의 겨울도 너무 추워. 구보씨는 잔뜩 몸을 움츠리며, 정말로 세상을 등지고 떠나가는 사람처럼 처연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는 구보씨에게 끊임없이 떠오르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 미술관의 학예연구사는 누구인가? - 전문가인가? 미술행정가인가? 아니면 전문인과 행정관료, 미술인과 미술인 간의 상호 불신에 치이고, 끼여서 욕을 뒤집어쓰는 어정쩡한 존재들인가? 제2의 문화 생산자인가, 문화의 간수장인가? 묘지기인가, 창조자인가, 조정자인가? 제도적 권력의 후견인인가, 아니면 그 권력의 은밀한 수혜자인가? 자신의 꿈을, 자신의 앎을, 자신의 신념을 스스로 실천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조직에 찌들고, 현실에 매몰되고, 미래를 덮어버린 불쌍한 생활인인가?

그러면 학예연구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해도, 그대 아직도 꿈꿀 수 있는가? 깨어 있다면 그 꿈, 지킬 수 있을까? 구보씨가, 그리고 모두가 가슴 속으로 품어오던 미술관. 스스로 무덤이기를 거부하고, 밖으로 온실이기를 거부하는 또 하나의 미술관. 미술을 넘어, 미술사를 건너서 또 다른 미술문화를 창출할 미술관, 안으로 미술의 본질을 질문하면서 밖으로 무한한 맥락을 내포시키는 미술관. 버려진 도시 환경을 소생시킬 강력한 진앙(震央)으로서의 미술관, 모든 문화와 연결되고 모든 시공간을 향해 열려 있는 미술관. 모든 계층의 모든 가치를 이해하고 온존시키는, 그래서, 큐레이터는 더 이상 간수장이 아니라 정치가였다고 말할 수 있는 미술관을?

★ 알다시피 이 글의 구성은, 박태원 이후 최인훈, 주인석, 김대식 등이 패러디한 연작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의 형식을 차용한 것이다. 그 외 인용부호 안의 몇몇 문구와 표현은 여러 사람의 미술 관련 에세이, 시집 등에서 도용하였다.

<포럼에이 5호,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