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년의 화법' 혹은 '정말로 말하기'
^^; | 2008-06-16 | 조회 3362
아래글은 <미술과 담론 1997 여름호>에서 퍼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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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년의 화법(話法)', 혹은 '정말로 말하기'
김 원 방 (미술평론가)
사회자가 한 미스코리아 후보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금 xx대학 xx과 2학년에 재학 중이신데요, 장래 희망이 무엇입니까?” “네에, 열심히 공부를 계속해서 대학교수가 되는 것입니다아 ~”.
내가 만일, 미인선발대회란 것이 별볼 일 없는 것으로 취급되는 유럽같은데 살고 있다면, “아, 저 아가씨는 만일 뽑히면 그 상금갖고 아르바이트 할 필요없이 열심히 공부해서 정말 대학교수가 될지도 모르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또는 80년대 어느 해였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미스 프랑스로 뽑힌 아가씨가 “나는 사실은 지구에 잠시 머무르고 있는 ‘화성인’이며 당신과 결혼하도록 운명지워졌다”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한 한국인 청년의 광신적 설득(?)에 감동하여, 프랑스의 시골에서 그와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던 일이 있었는데, 그 결혼의 결말이 어찌 되었든,이러한 인간과 화성인 사이의 엄청난 신분격차를 극복한 낭만적 결혼 같은 것이, 지금 저 미인대회의 어느 아가씨에게 또 발생할 수도 있다는 충분한 개연성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한데, 비록 ‘자기비하적 사고’라 매도될 수도 있겠으나, 한국적 매체문화생산물들에 상당히 쩔어 있는 채 지금 TV를 보고 있는 나로서는, 저 미스코리아 후보아가씨가 말하는 장래희망사항을 들으니 그저 어리둥절하고 무슨 뜻인지 통 종잡을 수가 없다.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말이 “미스코리아가 되면(되어도 계속) 대학교수가 되기 위한 그 험란한 인고(忍苦)의 과정을 걷겠다”는 것인지 - 즉 밑도 끝도 없이 자기각성을 촉구해야 하고, 학문적 양심의 룰을 준수하고, 외국논문들의 구름잡는 이야기들을 요약하고, 홀로 백년전 학자의 이론을 상상적으로 변호하다가, 도서관에서 달빛을 보아야만 자기가 잠시나마 용서되는 그런 긴 세월에 젊음을 바치며 - , 아니면 “만일 미스코리아에 떨어지거나, 스타연예인이 되지 못하면 하는 수 없이 대학교수나 되겠다”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한국과 같은 “연예공화국”에서 뽑는 미스코리아라면, 그리고 만약 내가 심사위원이라면 다음과 같이 외치는 아가씨에게 최고의 점수를 주리라: “장래희망요? 지금 당장 미스코리아가 되갖구 뜨는 거예요 ! 드라마, MC는 당연히 쓸어뻐리고 CF 할 때마다 수억씩 팡팡 챙기고, 재벌2세 오렌지들이 나 못만나 안달을 하고, 지하철 스포츠 신문 1면에 내 죽이는 누드가 ‘누구 벗었다 !!!’로 대문짝만하게 도배를 하고, 고삘이건 징그러운 중년남자건 침 갤갤 흘리고, 가끔 극성 팬들에게 납치도 되고, 무슨 트로이카 소리도 듣고, 뜬소문 결혼설에 인터뷰해명도 하고, 내 이름 딴 팔찌가 백화점에서 동이 나고, 뭐 아뭏든 그런게 하고 싶어 미치겠어요 !!~”
물론 실제로 이렇게 나오면 그건 ‘미친 년’이겠지만, 바로 그 ‘미친 년의 화법(話法)’에는 아까 “대학교수 어쩌구...”라고 말한 ‘정상적(normal) 아가씨’의 화법이 실연(實演)하지 못하는 ‘정말로 말하기’의 화법과 그 실패의 연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한국땅의 미스코리아란게 무엇인지 다 아는 마당에, 그 적나라한 담론을 금지시키고 “대학교수가 꿈”이라는 엉뚱한 담론을 차용해야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바로 거대한 부재의 어둠을 감추기 위한 ‘광명작전(光明作戰, Operation Sun Light)’일 것이다. 우수한 대학학점도 모자라 지적(知的)인 순발력과 악기연주실력까지도 입증해야 ‘미인’으로 평가되는 미국의 “Miss America선발대회”에서처럼, 사회자의 질문에 “대학교수의 꿈”, 심지어 “불우이웃” 운운하는 인문주의적 치장의 쇼는 그야말로 ‘최고의 정상적 미인’이라는 진실의 극치를 펼쳐내면서 그 공허를 감춘다. 따라서 예를 든 정상적 아가씨의 화법은 가장 그럴듯하고 충만한 진실의 기호들에 집착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화법만이 용인되는 이 미인대회는 쟝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를 빌면, 실재가 실재하지 않음을 감추고 실재의 모조물을 순환적으로 재생산해내는 “모조물의 공전운동(空轉運動, pr럄ession de simulacre)”이다. 그러한 모조물에 가장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행위는 바로 그러한 실재적 진실의 부재,미인의 부재라고 하는 가공성과 부재의 순환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러한 폭로에 이르기 위해서는 대학교수니, 미인이니 하는 진실의 담론을 절대로 ‘날카롭게’ 이해하려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진실이란 항상 ‘他者의 시선을 향해 던져진 날카로운 창’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학교수가 될 최고의 미인’이라는 의미의 궤적으로부터 절대로 벗어나지 않은 채 흥분한 관중의 시선에 날카롭게 꽂혀버리고 그 독으로 마비시키는 난폭함을 실행하며, 다른 뜻은 허용하지 않는 ‘가장 좁은 의미(denotation)’의 종교를 공표하는 ‘날카로움의 화법’이기 때문에, 당신이 그것을 ‘날카롭게’ 이해하려는 순간 그 미인들의 고상한 미래관과 육체적 각선미의 환상같은 조화에 감격하고 말 것이다.
부재를 폭로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가능한 한, ‘날카로운 의미’보다는 ‘무딘 의미’에 능한 ‘무딘 머리’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가능한 한 무디게, 더더욱 무디게, ‘지성과 미를 겸비한 표준미인’이라는 저 날카로운 의미들로부터 저 무디고 종잡을 수 없는 함축적 의미(connotation)들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 결국에는 ‘대학교수꿈의 표준미인’이라는 시니피앙(signifiant)의 시니피에(signifi? 자체가 완전히 황당해지고 마는 황당한 시니피에만의 바다, 또는 그러한 시니피에들의 ‘자동적 시뮬레이션’을 향해 무디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무딤의 극단’을 통해 공허와 부재의 늪을 목도하게 되면서, 우리는 지성있는 표준형 미인의 부재를, 뒤집어 말하면 이 미인대회는 “연예인으로 뜨고, 팡팡 챙기기 위한 것이다”라는 ‘(상당히 부당하게)억압된 쓰레기적 의미’의 새로운 현존을 되살릴 수 있는 것이다.
대학교수를 지망하건, 불우이웃돕기를 갈망하건,이러한 교양적 담론과 근사한 살덩어리의 담론이 남발되고 멋대로 접합되는 기표와 기의의 부페레스토랑은, 결국 최대한 무딘 머리를 통과할 때 오히려 가장 직접적 방식으로 결핍과 욕망을 드러내는 알레고리로 급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온갖 정의와 인류애의 모든 목록을 겸비한 할리우드 영화의 그 ‘날카로운’ 서사시(敍事詩)’처럼, 제 5공화국의 ‘날카로운’ 국정연설처럼, 졸부의 거실에 걸려있는 ‘날카로운’ 현대미술처럼........ 그러한 ‘날카로운’ 미인대회에서의 최고의 고상하고 황홀한 미스코리아와의 만남, 바로 이것이 내가 이곳의 미술, 미술계, 미술비평과 만난 방식이었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아까 가상적 예로서 든 그 ‘미친 년’의 담론, 즉 “연예인으로 뜨고, 팡팡 챙기기 위한 것이다”라는 이 미스코리아 출전동기의 잠정적인 메타언어적 진술이 금지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미인의 진실이 부재한다는 바로 그 진실을 폭로하는 성상파괴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미친 년’은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공포의 담론을, 아무도 감히 직접 대적할 수 없는 욕망의 에일리언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라는 영화의 ‘정식 주인공’으로 감히 선언하기 때문이다. ‘배면논리(背面論理)’없는 대답을 통해 비록 미스코리아에는 실패하지만, 순간적이나마 가장 ‘직접적인’ 만남의 순간을 창출해내는 그러한 ‘미친 년’의 황당한 화법. 오늘날 ‘미술에 관한 담론’은(계간 미술과 담론 역시) 바로 이러한 ‘매개없이 직접적으로 말하는 법’을 새로이 배워야만 한다.
부재의 깊이가 깊을 수록 그 모조물들은 고장없는 능률성과 장엄한 절차들을 필요로한다. 마치 미술가의 심오한 고뇌가 있는 것처럼, 마치 미술평론가의 엄정한 평가가 있는 것처럼... 모든 카메라가 심사위원의 표정과 사회자가 받아든 쪽지와, 미녀들의 표정을 클로즈업한다. 미스코리아대회의 밤은 무르익어간다. 마지막 CF가 준비된다.
또다른 시간인, 1995년 1월 어느 날 17시, 소위 “해체주의(d럄onstructionnisme)의 원조”, 그 유명한 쟈끄 데리다(Jacques Derrida)가 파리의 소르본느대학에서 강연회를 갖는다. 그는 오늘 예술에 대하여 또는 특정한 주제없이 제멋대로 이야기 하고 질문을 받을 것이다. 원형강의실은 철학부와 예술학부의 교수들, 박사과정 학생들, 학부생들, 지식인들, 소문듣고 찾아온 일반인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급기야 강연장은 대형 계단강의실로 옮겨진다. 모든 통로와 계단, 심지어 칠판 앞에 까지 점령한 청중들.
그는 자신의 강연주제에 대해 이야기 한다. 준비된 원고는 없다. 그는 루브르박물관에서의 전시에 대해 자신이 쓴 글 “盲目의 기억(m럐oire d’aveugle)”에 대해, 그리고 ‘흔적(trait)’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청중 속에는 청중같지 않은 이상한 청중이 하나 끼어 있다. 그는 데리다의 강연을 사사건건 방해하며, 시비를 건다. “저 작자, 지금 그 딴 얘기는 뭣하러 하는거야? 좀 유식하다고 하는 자들 말야, 맨날 한심한 얘기나 쪼개고 앉았쟎아 !” 침묵, 놀라움, 시선들... 데리다는 계속 자신의 말을 이어나간다. 이번에는 최근에 발간한 자신의 저서 “코라 Chora”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래 플라톤에게 있어 ‘장소‘를 의미하는 개념인 ‘코라’는 사물을 위한 것도, 하나의 존재자도 아니며, 모든 것이 형성되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이때 또 그 이상한 친구가 큰 목소리로 개입한다. “헤이헤이, 이봐 친구, 이제 지겨워, 좀 그만해, 저 작자 자기가 하는 말이 뭔 뜻인지나 알고 떠드는 거야? 이봐요, 당신, 그 코라인지 콜란지 무슨 뜻인지 설명할 수 있어? 해보슈 !”
이 이상한 친구, 30대 중반에 깡마르고 지저분하며, 생김새 자체가 ‘미스터 불만(不滿)’인 이 친구는 알 수 없는 동기로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 소르본느에 들어온 불청객 같다. 집없이 떠도는 부랑자가 틀림없어 보이는 그는 강연엔 관심없고 유난히 큰 목소리로 끊임없이 떠들고 불평하며, 강연을 방해한다. 데리다는 이 ‘소르본느의 이방인’의 욕같은 불평에 조용히 대답을 제공해 나간다. “코라의 좀더 상세한 의미를 묻는 질문이군요. ‘보충’하자면, 코라라는 것은 모든 논쟁적 권위를 와해시키는, 또는 담론의 내부에 차이를 도입하는 흔적, 혹은 ‘여백두기(espacement)’라고 할 수 있읍니다.” 이방인 큰소리로: “아이구야 !~, 이봐요, 당신들, 지금 저 쪼다같은 친구가 떠드는게 무슨 뜻인지 당신들 이해가 가? 이런거 해서 뭐하겠다는거야?” “우우 - , 이제 고만좀 하쇼 !” 청중들이 참다못해 야유를 보낸다. 그러나 이방인은 개의치 않는다. 사회를 보는 교수도, 그 누구도 이러한 고장난 강연회를 다시 고치거나 심사하거나 주재하려 들지 않는다. 데리다는 말을 이어나간다.
“‘코라’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선언이며, 어떤 한정적 형태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흔?br> 岵?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질문들. “개념이 구워진다(Le concept est cuit)는 말이 무슨 뜻이냐”라는 청중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 그리고 이방인의 시끄러운 비난이 뒤얽힌 채 2시간의 강연은 종료된다.
소르본느의 ‘실패한 대회’. 데리다와 이방인 사이의 실패한 화합, 하지만 이 직접적인 만남. 그 이방인은 ‘소르본느에 온 데리다’라는 예정된 우아한 무대의 틈새를 파괴적으로 갈라내며, 데리다는 그러한 황당한 담론의 콜라쥬 현장에 침착하게 자신을 접목시킨다. 아무도 그 이방인을, 아무도 데리다를, 아무도 청중을 주재하지 않는다. 청중의 약간의 원성과 소음이 있지만 그것마저 접목된다. 이 철저하게 비능률적인 강연회. ‘철학의 master’라는 담합된 재현도, ‘소외된 무대 밖의 이방인’이란 재현도 없다. 소르본느라는 이 ‘미스프랑스 경연장’, 이 담론적 권력의 산실은 ‘차연(diffeance)’된다. 소르본느는 데리다가 아르토(Artaud)의 표현을 빌어 말하는 ‘파괴의 담론(담론의 파괴)만이 증식하는 잔혹극의 무대"가 되어 버린다. 주연도 엑스트라도 감독도 없는 황야 같은 '코라'-소르본느.
바로 이러한 말하기의 시공성(時空性)이, 이 미술계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직접적으로 말하는 방법'이며 새로운 '코라'이다. 둘러치지 않고, 꾀부리지 않고, 시침떼지 않고, 귀막지 않고, 공연히 윙크하지 않고, 이따 따로 잠깐 만나자는 은밀한 제안없이, 직접적으로 말 걸고, '정말로' 대답함으로써 ('정말'을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담론적 권력의 쟁취에는 실패하지만 자신을 '타자(他者)라고하는 열정과 공포에 접목시키고야 마는 '황야의 무법적 담론'말이다.
한국의 미술계에서 과잉생산된 것은 "장래 뭐가 되고 싶어요? -네, xx가 되고 싶어요오~"가 화사한 목소리로 만발하고 박수가 터지는 '기막힌 행사(行事)적 센스', 밑도 끝도 없는 'Stage manner'의 열병이다. 만일 당신이 천편일률적인 미인들과 그들의 인터뷰에 질렸다면 이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모두가 반 고호이고 모두가 보들레르, 모두가 에디슨, 모두가 케자르인 이 엄청난 천재집합소에서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술무대의 마이크를 통해 울려퍼지는 '예술적 대답의 정치적 모조물'을 포기하고, 이를 '미친 년의 직접적인 대답'으로, 데리다와 이방인 사이의 '실패한 화합'으로, '정말로 묻고 정말로 대답하기'로 대치하는 것이다. 이제 '질문의 힘', '대답의 힘', '예술의 힘', '비평의 힘' 같은 것은 그만 생각하자. 왜냐하면 질문, 대답, 예술, 비평은 자신이 이미 힘의 한 형태이며, 힘이란 '그 무엇의 힘(the power of something)'으로 객체화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힘쓰는 예술가'? '힘쓰는 비평가'? 힘이란 예술이나 비평의 문제이지 예술가와 비평가의 문제가 아니다. 미술의 담론, 혹은 미술과 담론, 그 말만 들어도 피곤한 이유는 그 주제가 힘을 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을 빼는 데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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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년의 화법(話法)', 혹은 '정말로 말하기'
김 원 방 (미술평론가)
사회자가 한 미스코리아 후보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금 xx대학 xx과 2학년에 재학 중이신데요, 장래 희망이 무엇입니까?” “네에, 열심히 공부를 계속해서 대학교수가 되는 것입니다아 ~”.
내가 만일, 미인선발대회란 것이 별볼 일 없는 것으로 취급되는 유럽같은데 살고 있다면, “아, 저 아가씨는 만일 뽑히면 그 상금갖고 아르바이트 할 필요없이 열심히 공부해서 정말 대학교수가 될지도 모르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또는 80년대 어느 해였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미스 프랑스로 뽑힌 아가씨가 “나는 사실은 지구에 잠시 머무르고 있는 ‘화성인’이며 당신과 결혼하도록 운명지워졌다”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한 한국인 청년의 광신적 설득(?)에 감동하여, 프랑스의 시골에서 그와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던 일이 있었는데, 그 결혼의 결말이 어찌 되었든,이러한 인간과 화성인 사이의 엄청난 신분격차를 극복한 낭만적 결혼 같은 것이, 지금 저 미인대회의 어느 아가씨에게 또 발생할 수도 있다는 충분한 개연성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한데, 비록 ‘자기비하적 사고’라 매도될 수도 있겠으나, 한국적 매체문화생산물들에 상당히 쩔어 있는 채 지금 TV를 보고 있는 나로서는, 저 미스코리아 후보아가씨가 말하는 장래희망사항을 들으니 그저 어리둥절하고 무슨 뜻인지 통 종잡을 수가 없다.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말이 “미스코리아가 되면(되어도 계속) 대학교수가 되기 위한 그 험란한 인고(忍苦)의 과정을 걷겠다”는 것인지 - 즉 밑도 끝도 없이 자기각성을 촉구해야 하고, 학문적 양심의 룰을 준수하고, 외국논문들의 구름잡는 이야기들을 요약하고, 홀로 백년전 학자의 이론을 상상적으로 변호하다가, 도서관에서 달빛을 보아야만 자기가 잠시나마 용서되는 그런 긴 세월에 젊음을 바치며 - , 아니면 “만일 미스코리아에 떨어지거나, 스타연예인이 되지 못하면 하는 수 없이 대학교수나 되겠다”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한국과 같은 “연예공화국”에서 뽑는 미스코리아라면, 그리고 만약 내가 심사위원이라면 다음과 같이 외치는 아가씨에게 최고의 점수를 주리라: “장래희망요? 지금 당장 미스코리아가 되갖구 뜨는 거예요 ! 드라마, MC는 당연히 쓸어뻐리고 CF 할 때마다 수억씩 팡팡 챙기고, 재벌2세 오렌지들이 나 못만나 안달을 하고, 지하철 스포츠 신문 1면에 내 죽이는 누드가 ‘누구 벗었다 !!!’로 대문짝만하게 도배를 하고, 고삘이건 징그러운 중년남자건 침 갤갤 흘리고, 가끔 극성 팬들에게 납치도 되고, 무슨 트로이카 소리도 듣고, 뜬소문 결혼설에 인터뷰해명도 하고, 내 이름 딴 팔찌가 백화점에서 동이 나고, 뭐 아뭏든 그런게 하고 싶어 미치겠어요 !!~”
물론 실제로 이렇게 나오면 그건 ‘미친 년’이겠지만, 바로 그 ‘미친 년의 화법(話法)’에는 아까 “대학교수 어쩌구...”라고 말한 ‘정상적(normal) 아가씨’의 화법이 실연(實演)하지 못하는 ‘정말로 말하기’의 화법과 그 실패의 연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한국땅의 미스코리아란게 무엇인지 다 아는 마당에, 그 적나라한 담론을 금지시키고 “대학교수가 꿈”이라는 엉뚱한 담론을 차용해야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바로 거대한 부재의 어둠을 감추기 위한 ‘광명작전(光明作戰, Operation Sun Light)’일 것이다. 우수한 대학학점도 모자라 지적(知的)인 순발력과 악기연주실력까지도 입증해야 ‘미인’으로 평가되는 미국의 “Miss America선발대회”에서처럼, 사회자의 질문에 “대학교수의 꿈”, 심지어 “불우이웃” 운운하는 인문주의적 치장의 쇼는 그야말로 ‘최고의 정상적 미인’이라는 진실의 극치를 펼쳐내면서 그 공허를 감춘다. 따라서 예를 든 정상적 아가씨의 화법은 가장 그럴듯하고 충만한 진실의 기호들에 집착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화법만이 용인되는 이 미인대회는 쟝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를 빌면, 실재가 실재하지 않음을 감추고 실재의 모조물을 순환적으로 재생산해내는 “모조물의 공전운동(空轉運動, pr럄ession de simulacre)”이다. 그러한 모조물에 가장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행위는 바로 그러한 실재적 진실의 부재,미인의 부재라고 하는 가공성과 부재의 순환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러한 폭로에 이르기 위해서는 대학교수니, 미인이니 하는 진실의 담론을 절대로 ‘날카롭게’ 이해하려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진실이란 항상 ‘他者의 시선을 향해 던져진 날카로운 창’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학교수가 될 최고의 미인’이라는 의미의 궤적으로부터 절대로 벗어나지 않은 채 흥분한 관중의 시선에 날카롭게 꽂혀버리고 그 독으로 마비시키는 난폭함을 실행하며, 다른 뜻은 허용하지 않는 ‘가장 좁은 의미(denotation)’의 종교를 공표하는 ‘날카로움의 화법’이기 때문에, 당신이 그것을 ‘날카롭게’ 이해하려는 순간 그 미인들의 고상한 미래관과 육체적 각선미의 환상같은 조화에 감격하고 말 것이다.
부재를 폭로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가능한 한, ‘날카로운 의미’보다는 ‘무딘 의미’에 능한 ‘무딘 머리’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가능한 한 무디게, 더더욱 무디게, ‘지성과 미를 겸비한 표준미인’이라는 저 날카로운 의미들로부터 저 무디고 종잡을 수 없는 함축적 의미(connotation)들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 결국에는 ‘대학교수꿈의 표준미인’이라는 시니피앙(signifiant)의 시니피에(signifi? 자체가 완전히 황당해지고 마는 황당한 시니피에만의 바다, 또는 그러한 시니피에들의 ‘자동적 시뮬레이션’을 향해 무디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무딤의 극단’을 통해 공허와 부재의 늪을 목도하게 되면서, 우리는 지성있는 표준형 미인의 부재를, 뒤집어 말하면 이 미인대회는 “연예인으로 뜨고, 팡팡 챙기기 위한 것이다”라는 ‘(상당히 부당하게)억압된 쓰레기적 의미’의 새로운 현존을 되살릴 수 있는 것이다.
대학교수를 지망하건, 불우이웃돕기를 갈망하건,이러한 교양적 담론과 근사한 살덩어리의 담론이 남발되고 멋대로 접합되는 기표와 기의의 부페레스토랑은, 결국 최대한 무딘 머리를 통과할 때 오히려 가장 직접적 방식으로 결핍과 욕망을 드러내는 알레고리로 급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온갖 정의와 인류애의 모든 목록을 겸비한 할리우드 영화의 그 ‘날카로운’ 서사시(敍事詩)’처럼, 제 5공화국의 ‘날카로운’ 국정연설처럼, 졸부의 거실에 걸려있는 ‘날카로운’ 현대미술처럼........ 그러한 ‘날카로운’ 미인대회에서의 최고의 고상하고 황홀한 미스코리아와의 만남, 바로 이것이 내가 이곳의 미술, 미술계, 미술비평과 만난 방식이었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아까 가상적 예로서 든 그 ‘미친 년’의 담론, 즉 “연예인으로 뜨고, 팡팡 챙기기 위한 것이다”라는 이 미스코리아 출전동기의 잠정적인 메타언어적 진술이 금지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미인의 진실이 부재한다는 바로 그 진실을 폭로하는 성상파괴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미친 년’은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공포의 담론을, 아무도 감히 직접 대적할 수 없는 욕망의 에일리언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라는 영화의 ‘정식 주인공’으로 감히 선언하기 때문이다. ‘배면논리(背面論理)’없는 대답을 통해 비록 미스코리아에는 실패하지만, 순간적이나마 가장 ‘직접적인’ 만남의 순간을 창출해내는 그러한 ‘미친 년’의 황당한 화법. 오늘날 ‘미술에 관한 담론’은(계간 미술과 담론 역시) 바로 이러한 ‘매개없이 직접적으로 말하는 법’을 새로이 배워야만 한다.
부재의 깊이가 깊을 수록 그 모조물들은 고장없는 능률성과 장엄한 절차들을 필요로한다. 마치 미술가의 심오한 고뇌가 있는 것처럼, 마치 미술평론가의 엄정한 평가가 있는 것처럼... 모든 카메라가 심사위원의 표정과 사회자가 받아든 쪽지와, 미녀들의 표정을 클로즈업한다. 미스코리아대회의 밤은 무르익어간다. 마지막 CF가 준비된다.
또다른 시간인, 1995년 1월 어느 날 17시, 소위 “해체주의(d럄onstructionnisme)의 원조”, 그 유명한 쟈끄 데리다(Jacques Derrida)가 파리의 소르본느대학에서 강연회를 갖는다. 그는 오늘 예술에 대하여 또는 특정한 주제없이 제멋대로 이야기 하고 질문을 받을 것이다. 원형강의실은 철학부와 예술학부의 교수들, 박사과정 학생들, 학부생들, 지식인들, 소문듣고 찾아온 일반인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급기야 강연장은 대형 계단강의실로 옮겨진다. 모든 통로와 계단, 심지어 칠판 앞에 까지 점령한 청중들.
그는 자신의 강연주제에 대해 이야기 한다. 준비된 원고는 없다. 그는 루브르박물관에서의 전시에 대해 자신이 쓴 글 “盲目의 기억(m럐oire d’aveugle)”에 대해, 그리고 ‘흔적(trait)’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청중 속에는 청중같지 않은 이상한 청중이 하나 끼어 있다. 그는 데리다의 강연을 사사건건 방해하며, 시비를 건다. “저 작자, 지금 그 딴 얘기는 뭣하러 하는거야? 좀 유식하다고 하는 자들 말야, 맨날 한심한 얘기나 쪼개고 앉았쟎아 !” 침묵, 놀라움, 시선들... 데리다는 계속 자신의 말을 이어나간다. 이번에는 최근에 발간한 자신의 저서 “코라 Chora”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래 플라톤에게 있어 ‘장소‘를 의미하는 개념인 ‘코라’는 사물을 위한 것도, 하나의 존재자도 아니며, 모든 것이 형성되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이때 또 그 이상한 친구가 큰 목소리로 개입한다. “헤이헤이, 이봐 친구, 이제 지겨워, 좀 그만해, 저 작자 자기가 하는 말이 뭔 뜻인지나 알고 떠드는 거야? 이봐요, 당신, 그 코라인지 콜란지 무슨 뜻인지 설명할 수 있어? 해보슈 !”
이 이상한 친구, 30대 중반에 깡마르고 지저분하며, 생김새 자체가 ‘미스터 불만(不滿)’인 이 친구는 알 수 없는 동기로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 소르본느에 들어온 불청객 같다. 집없이 떠도는 부랑자가 틀림없어 보이는 그는 강연엔 관심없고 유난히 큰 목소리로 끊임없이 떠들고 불평하며, 강연을 방해한다. 데리다는 이 ‘소르본느의 이방인’의 욕같은 불평에 조용히 대답을 제공해 나간다. “코라의 좀더 상세한 의미를 묻는 질문이군요. ‘보충’하자면, 코라라는 것은 모든 논쟁적 권위를 와해시키는, 또는 담론의 내부에 차이를 도입하는 흔적, 혹은 ‘여백두기(espacement)’라고 할 수 있읍니다.” 이방인 큰소리로: “아이구야 !~, 이봐요, 당신들, 지금 저 쪼다같은 친구가 떠드는게 무슨 뜻인지 당신들 이해가 가? 이런거 해서 뭐하겠다는거야?” “우우 - , 이제 고만좀 하쇼 !” 청중들이 참다못해 야유를 보낸다. 그러나 이방인은 개의치 않는다. 사회를 보는 교수도, 그 누구도 이러한 고장난 강연회를 다시 고치거나 심사하거나 주재하려 들지 않는다. 데리다는 말을 이어나간다.
“‘코라’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선언이며, 어떤 한정적 형태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흔?br> 岵?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질문들. “개념이 구워진다(Le concept est cuit)는 말이 무슨 뜻이냐”라는 청중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 그리고 이방인의 시끄러운 비난이 뒤얽힌 채 2시간의 강연은 종료된다.
소르본느의 ‘실패한 대회’. 데리다와 이방인 사이의 실패한 화합, 하지만 이 직접적인 만남. 그 이방인은 ‘소르본느에 온 데리다’라는 예정된 우아한 무대의 틈새를 파괴적으로 갈라내며, 데리다는 그러한 황당한 담론의 콜라쥬 현장에 침착하게 자신을 접목시킨다. 아무도 그 이방인을, 아무도 데리다를, 아무도 청중을 주재하지 않는다. 청중의 약간의 원성과 소음이 있지만 그것마저 접목된다. 이 철저하게 비능률적인 강연회. ‘철학의 master’라는 담합된 재현도, ‘소외된 무대 밖의 이방인’이란 재현도 없다. 소르본느라는 이 ‘미스프랑스 경연장’, 이 담론적 권력의 산실은 ‘차연(diffeance)’된다. 소르본느는 데리다가 아르토(Artaud)의 표현을 빌어 말하는 ‘파괴의 담론(담론의 파괴)만이 증식하는 잔혹극의 무대"가 되어 버린다. 주연도 엑스트라도 감독도 없는 황야 같은 '코라'-소르본느.
바로 이러한 말하기의 시공성(時空性)이, 이 미술계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직접적으로 말하는 방법'이며 새로운 '코라'이다. 둘러치지 않고, 꾀부리지 않고, 시침떼지 않고, 귀막지 않고, 공연히 윙크하지 않고, 이따 따로 잠깐 만나자는 은밀한 제안없이, 직접적으로 말 걸고, '정말로' 대답함으로써 ('정말'을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담론적 권력의 쟁취에는 실패하지만 자신을 '타자(他者)라고하는 열정과 공포에 접목시키고야 마는 '황야의 무법적 담론'말이다.
한국의 미술계에서 과잉생산된 것은 "장래 뭐가 되고 싶어요? -네, xx가 되고 싶어요오~"가 화사한 목소리로 만발하고 박수가 터지는 '기막힌 행사(行事)적 센스', 밑도 끝도 없는 'Stage manner'의 열병이다. 만일 당신이 천편일률적인 미인들과 그들의 인터뷰에 질렸다면 이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모두가 반 고호이고 모두가 보들레르, 모두가 에디슨, 모두가 케자르인 이 엄청난 천재집합소에서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술무대의 마이크를 통해 울려퍼지는 '예술적 대답의 정치적 모조물'을 포기하고, 이를 '미친 년의 직접적인 대답'으로, 데리다와 이방인 사이의 '실패한 화합'으로, '정말로 묻고 정말로 대답하기'로 대치하는 것이다. 이제 '질문의 힘', '대답의 힘', '예술의 힘', '비평의 힘' 같은 것은 그만 생각하자. 왜냐하면 질문, 대답, 예술, 비평은 자신이 이미 힘의 한 형태이며, 힘이란 '그 무엇의 힘(the power of something)'으로 객체화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힘쓰는 예술가'? '힘쓰는 비평가'? 힘이란 예술이나 비평의 문제이지 예술가와 비평가의 문제가 아니다. 미술의 담론, 혹은 미술과 담론, 그 말만 들어도 피곤한 이유는 그 주제가 힘을 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을 빼는 데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