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할거나
심홍재 | 2008-05-18 | 조회 2019
작가 장정일씨가 쓴 글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평소 존경받던 지식인이나 원로들이 가끔씩 이치에 맞지 않는 발언으로
사람들을 종종 실망시키는 경우가 있다고.
그런 경우 대부분 갑작스레 세계관을 바꾸거나 어딘가로 전향을 해서라기보단
잘못된 중용을 취하기 때문이라고 장정일씨는 얘기 하는데요
정말 우리는, 어려서는 부모님에게 자라서는 학교의 선생님에게
“항상 중용을 취해라”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마라”
균형의 중요성을 배우며 그렇게 살도록 다짐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 중용이나 균형이란 것을 잘못 취하다 보면
결국은 극단에 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를 작가는 하고 싶어 합니다.
10의 중간은 5의 언저리일 것이지만
100의 중간은 50의 언저리, 1000의 중간은 500의 언저리…
이렇게 중용을 추구하다 보면 어느 문제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보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위치에 서있게 됩니다.
그래서 존경받던 어른이 어쩌다 우리에게 실망을 주는 경우는
‘기계적 중립’을 취하려고 하는데서 기인한다는 얘기에
저도 조금은 동조를 하고 싶습니다.
지금 도립 미술관의 문제가 지역 미술판에서는 큰 이슈가 되어 있습니다
도립 미술관은 문을 열기 전부터 삐걱이는 소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문제점들에 대한 토로가 수없이 나왔는데도
해결점이나 보완책에는 이렇다 할 결과없이
작금에는 관장님의 재 3 연임까지 결정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가는 분의 뒷 모습을 아름답게 해주는 것 또한
미술인들의 몫이라고 얘기했던 방관자?적 중립적 마음이
이러한 문제점들을 이슈화 시키고 같이 고민해 보려는
뜻있는 후배들의 지친 어깨를 보면서
나 또한 자신도 모르게
보수적이고 시대 착오적인 위치에 서있는
나 혼자의 일신을 위해 그저 그릇찾기 싸움에 몰려든 파리처럼
볼성 사나운 모습이 되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가의 길에 서서 작업을 하다 보면
가당치 않은 현실은 허한 한숨으로 빈 허공을 바라 보지만
수많은 고민과 번뇌의 시간이 흐르고
세월을 버텨 가다 보면
미래 현실속의 좀더 나은 모습을 찾는 쪽을 결정하여
하나씩, 하나씩 준비를 해나가게 됩니다.
더군다나 그 버텨온 세월들을 함께했던 사람들이
요소 요소에 자리하게 되면서
청년의 마음으로 열정을 바쳐 진행하려 했던 일들을 풀어가는데
서로에게 부빌 언덕이 되어 줄 수 있을거라는 희망적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우연찮은 순간, 순간들은
그렇게 준비하여 만들어가는 작은 성의 모습을
공허롭게 만들어 버리기도 하지요
연임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해 듣고
묵살되어지는 뜻있는 작은 목소리들의 아우성이 환청처럼 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기득권자들의 놀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한숨에 땅이 꺼져가는 후배들을 보면서
수수방관 애쓴다라는 격려만하고 있었던 내 자신을 얼마나 추하게 보았을까 하는 마음에
미안하고 초라해짐을 느꼈습니다
'좋은 생각이 나거든 실천하기를 게을리 하지마라'는
스스로의 좌우명이 얼마나 쑥스럽고 가당찮은 말인가를 새삼 느끼면서
'기계적 중립'이 아닌
진정으로 지역 미술계의 발전을 위해 애쓰는 그들의 편에 같은 목소리를 내어 주는게
선배들의 몫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래전,
전라북도 미술대전이 관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이관되어야 한다는 의견에
도내 미술인들이 예술회관 계단에 모여 앉아
그 의견을 전하기 위한 애틋한 몸부림들이 생각났습니다
모두가 한뜻이 되어 전한 우리 목소리의 진정성이
지금 미술협회에서 미술대전을 주관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낸 것이죠
그렇게,
그렇게 문제점 있는 우리의 일들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
참 선비가 아닐까하는
그래서 우리가 미래 세대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아야 하는가를...
+++++++++++++++++
잠깐의 비가 모내기를 준비하는 논으로 가득 합니다
귀할때 물을 가두는 법을 알기에
가을의 풍성함이 눈에 선하겠죠
그런 마음으로 그릇을 채워 가야 하겠죠
평소 존경받던 지식인이나 원로들이 가끔씩 이치에 맞지 않는 발언으로
사람들을 종종 실망시키는 경우가 있다고.
그런 경우 대부분 갑작스레 세계관을 바꾸거나 어딘가로 전향을 해서라기보단
잘못된 중용을 취하기 때문이라고 장정일씨는 얘기 하는데요
정말 우리는, 어려서는 부모님에게 자라서는 학교의 선생님에게
“항상 중용을 취해라”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마라”
균형의 중요성을 배우며 그렇게 살도록 다짐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 중용이나 균형이란 것을 잘못 취하다 보면
결국은 극단에 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를 작가는 하고 싶어 합니다.
10의 중간은 5의 언저리일 것이지만
100의 중간은 50의 언저리, 1000의 중간은 500의 언저리…
이렇게 중용을 추구하다 보면 어느 문제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보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위치에 서있게 됩니다.
그래서 존경받던 어른이 어쩌다 우리에게 실망을 주는 경우는
‘기계적 중립’을 취하려고 하는데서 기인한다는 얘기에
저도 조금은 동조를 하고 싶습니다.
지금 도립 미술관의 문제가 지역 미술판에서는 큰 이슈가 되어 있습니다
도립 미술관은 문을 열기 전부터 삐걱이는 소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문제점들에 대한 토로가 수없이 나왔는데도
해결점이나 보완책에는 이렇다 할 결과없이
작금에는 관장님의 재 3 연임까지 결정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가는 분의 뒷 모습을 아름답게 해주는 것 또한
미술인들의 몫이라고 얘기했던 방관자?적 중립적 마음이
이러한 문제점들을 이슈화 시키고 같이 고민해 보려는
뜻있는 후배들의 지친 어깨를 보면서
나 또한 자신도 모르게
보수적이고 시대 착오적인 위치에 서있는
나 혼자의 일신을 위해 그저 그릇찾기 싸움에 몰려든 파리처럼
볼성 사나운 모습이 되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가의 길에 서서 작업을 하다 보면
가당치 않은 현실은 허한 한숨으로 빈 허공을 바라 보지만
수많은 고민과 번뇌의 시간이 흐르고
세월을 버텨 가다 보면
미래 현실속의 좀더 나은 모습을 찾는 쪽을 결정하여
하나씩, 하나씩 준비를 해나가게 됩니다.
더군다나 그 버텨온 세월들을 함께했던 사람들이
요소 요소에 자리하게 되면서
청년의 마음으로 열정을 바쳐 진행하려 했던 일들을 풀어가는데
서로에게 부빌 언덕이 되어 줄 수 있을거라는 희망적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우연찮은 순간, 순간들은
그렇게 준비하여 만들어가는 작은 성의 모습을
공허롭게 만들어 버리기도 하지요
연임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해 듣고
묵살되어지는 뜻있는 작은 목소리들의 아우성이 환청처럼 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기득권자들의 놀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한숨에 땅이 꺼져가는 후배들을 보면서
수수방관 애쓴다라는 격려만하고 있었던 내 자신을 얼마나 추하게 보았을까 하는 마음에
미안하고 초라해짐을 느꼈습니다
'좋은 생각이 나거든 실천하기를 게을리 하지마라'는
스스로의 좌우명이 얼마나 쑥스럽고 가당찮은 말인가를 새삼 느끼면서
'기계적 중립'이 아닌
진정으로 지역 미술계의 발전을 위해 애쓰는 그들의 편에 같은 목소리를 내어 주는게
선배들의 몫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래전,
전라북도 미술대전이 관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이관되어야 한다는 의견에
도내 미술인들이 예술회관 계단에 모여 앉아
그 의견을 전하기 위한 애틋한 몸부림들이 생각났습니다
모두가 한뜻이 되어 전한 우리 목소리의 진정성이
지금 미술협회에서 미술대전을 주관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낸 것이죠
그렇게,
그렇게 문제점 있는 우리의 일들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
참 선비가 아닐까하는
그래서 우리가 미래 세대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아야 하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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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비가 모내기를 준비하는 논으로 가득 합니다
귀할때 물을 가두는 법을 알기에
가을의 풍성함이 눈에 선하겠죠
그런 마음으로 그릇을 채워 가야 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