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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미술인들에게 올리는 글
표영용 | 2008-04-13 | 조회 2380
완연한 봄이 이곧 모악산에 왔습니다.
따스한 봄빛과 봄내음이 물씬 풍기는 등산로는 봄을 만끽하려는 등산객으로 붐비고 있습니다. 우리 미술인들 모두에게도 따뜻한 봄이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부터 개진해오는 도립미술관 3차 재임용반대운동이 이젠 퇴진운동으로 명칭을 바꾸어 진행 하여야 할 사항이 왔습니다.
물론 모든 미술인들이 우리의 생각에 동참하시고 찬성하리라 생각지 않으며, 또 우리에게 무조건적 호응을 바라진 않습니다.

진행상에 불미스럽게도 우리 전북 미술인들에게 본의 아니게 오해와 불신을 주었다면 송구스럽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오해와 불신을 접기 위해서 최소한의 입장은 밝히고 진행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진행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하고 있는 김삼렬 (전 전북미협사무국장)이 마치 이강원 지회장을 미술관 관장 만들기 위해 이 일에 개입한 것처럼 음해적인 소문이 나돌아 한 말씀드리려 합니다.
김삼렬 선생이 전 전북미협 사무국장으로 이강원지회장을 모셨다고 해서 김삼렬의 모든 행동이 이강원 지회장과 연결 시켜 김삼렬선생의 개인적 생각과 의견이 이강원 지회장의 생각으로 탈바꿈 시킨다면 누가 사무국장일을 하며 미협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마치 전 사무국장이라 해서 이강원선생님의 비서나 대리인으로 폄하하고 개인적 판단에서 개진해 오는 일을 이강원선생의 지휘로 인식한다면 한개인의 인격과 인성을 죽이는 폭력이나 다름없음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이러한 괴 소문은 지역 어느 인사에게나 괴소문을 부쳐 마치 누가 미술관장을 하려고 이일을 추진한다고 음해하여 본 문제의 도출을 희석시키고 미술인들을 분열시키려는 수작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본 논지는 미술관에 대하여 그동안 미술인들이 우려하고 불만이었던 사항들과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항들을 도출시켜 공유하고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 전북 미술인들은 어떤 특정세력이나 코드로 미술문화를 형성 하려는 것을 모두들 우려 하고 있으며, 다양한 미술문화의 정착을 위해서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 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지역적으로도 열악하고, 미술인들의 수도 점점 줄어가고 있으며 신진작가들을 찾기가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이는 지역성이라는 것도 있지만 그만큼 미술인으로 살아가기엔 경제적 여건이나 기타 제반사항들이 받쳐지질 않고 있다는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대학도 그 기능이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여론들과 전북 미술이 몇몇 소수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정치적 세력과 결탁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들도 많습니다. 언제부턴가 명분과 주체성은 사라지고 집단이기주의 팽배와 더불어 경제가 코드인 세상이 되어 마치 경제 지상주의화 되어버린 세상에 한없이 서글퍼집니다.

우리 미술인들은 경제적 부의 축적을 위해서 작업하고 명예만을 위하여 사투를 벌이며 어려운 생활을 고집스럽게 이어가고 있는게 아니었던 것을 우린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곧고 강했으며 그러한 작가의 정신이 칭송을 받아왔습니다.
돌이켜 보고 싶습니다. 삶이 또는 사회가 그리 변하여 우리의 명분과 작가정신이 사회적 통념의 유용성에서 벗어나고 바보처럼 여겨진들 그 무엇이 우리의 가치를 떨어트리겠습니까?

국가가 공공의 이름으로 미술문화에 투자하고 지원하는 것은 원론적으로 이러한 깊은 이해와 혜량이 오래전의 선배들로부터 이어온 맥락이 있었음을 우린 감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작가는 개인일 수 있지만 미술문화는 개인일 수 없으며 작가손에 벗어난 작품들은 이미 공유된 세상에 나온 하나의 존재로 삶을 이어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은 어쩌면 역사이며 공인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됨을 우린 알고 있습니다.

미술인 여러분 작게는 우리 지역과 조금 넓게는 국가와 넓게는 세상에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의 문을 열고 만들고 보여줌으로서 우리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우린 더욱 자긍심이 있었으며 그 어떤 어려움과 시련들도 의미였습니다.

개인에 이익과 개인의 삶의 욕망을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거시적 시각과 의미 안에서 그것들이 가능 하다는 것을 잊어선 않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지켜야할 사항과 그렇지 않은 사항을 스스로가 절제하고 집중하고 공유하고 함께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파이를 나눠 갖기 위해선 서로의 믿음과 절제가 필요합니다. 파이를 키워가는 사람
나눠야 할 사람 그리고 그 파이를 먹어야 할 사람들의 임무가 있으며 먹는 사람도 그 크기와 위치를 찾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아이가 먹을 우유를 어른이 빼앗아 먹는다면 아이는 성장 할 수 없음을 우린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린 절제가 필요하며 안배의 균형들이 필요하고 구심점이 필요합니다. 어느 한사람 또는 몇몇이서 이뤄 낼 수 없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위해선 모두들 같이 동참하고 의지를 보여줌으로서 하나하나 개선되어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작가도 사회인이기에 사회를 담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작가의 상상력과 창작은 그 작가를 담고 있는 사회의 반영입니다.
그러므로 작품은 사회를 떠나 세상에 나올 수 없으며 사회로부터 단절된 창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단지 세상을 바라보는 나와,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나가 있으며, 그중 세상을 보는나 중심점과 세상에서 나를 보는 중심점만이 존재하게 됩니다.
이러한 의식을 떠날 때 초인지적 관점의 자신이 도출이 됩니다.
고로 사회적 관심을 접는다는 것은 단지 접는 것일뿐 관심을 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포기일 뿐입니다. 포기 또한 이면의 관심기도 합니다.
단지 참여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여를 주장합니다. 그것이 설령 반대의 입장에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미천하나마 저의 작지만 큰소망이 이뤄지기 간절히 바라며 두서없는 글을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서양화  표 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