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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미술관으로 가는 길
봄봄 | 2005-01-24 | 조회 5404
[그림] 나의 일상이 그렇게 갔다

오늘은 오늘의 얘기를 해야 하는데
문득 '오래된 미래'의 어감처럼 어제를 얘기하고 싶어졌다.
또한 이 미디어 시대에 그림을 본다는 것이 나조차도 생경하게 느껴졌나 보다.
그런데 다이어리의 어제 날짜에 이렇게 적었다.

도립미술관 가다 - 현대미술전(박수근, 황주리, 김중섭, 김환기, 천경자, 이석주 등)
대원사 오르다 - 커피를 나누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림들을 날랐다고 하기에,
상학으로 가는 버스를 내내 기다려도 오지 않고 있는데
띵동, 후배의 문자 오다.
언니, 지금 어디서 뭐하세요? 사무실에 있는데 심심하시면 놀러 오세요^^
마치 내가 방황하는 청소년처럼, 좌표를 잃은 어른처럼 느껴지며 답장을 썼다.
미술관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버스는 안 오고...
그 참에 버스가 왔다. 엥!
휴대폰을 덮고.

그래서,,, 삶이란 늘 우습게도 순간에, 찰나에 방향을 틀기도 한다.

마치 미술관을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다른 내용의 준비하던 글을 마무리하고 있을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그때 버스가 오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도 그냥 시내 후배 사무실로 갔을지도 모른다.

미술관은 내 생각에도 위치는 참 잘 정했다 싶다.
그림을 보러 일부러 미술관에 가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모악이 거기 있었기에,
미술관에 등산화를 신은 사람들이 아이들과 함께
그림이라는 것을 보러 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중요한 것은 문화를 접하고자 하는 욕구가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발걸음에 있는 것이다.
그 발걸음을 매표소로 옮긴다.

매표소에서 왈 : (웃으며) 학생이에요?
나 왈 : (ㅋㅋ 웃으며) 아니에요.
순간, 기분은 좋았지만, 나는 이제 내 얼굴에서도 제 나이를 먹고 싶다.

알면 보이나니, 하지만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알지 않아도 뭔가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쉽지가 않았다.

이석주의 '일상'이라는 그림이 있었다.
남녀가(부부인지 연인인지 모를) 뒷모습을 보이고 있다.
머리에서 어깨까지의 상반신 모습이었는데
뭐랄까, 남자의 더벅머리 부분, 그리고 여자의 파마가 푸석거리는 듯한.

지금, 그들의 상황은 어떤 것일까?
방금 자고 일어난?
아님 헤어지기 일보 직전?
나른함인가?
치열함인가?

그런데 그들이 바라보는 시선대로 방향을 그리면
그들은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할 좌표의 형태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의 화면 안에 뒷모습을 보이고 서 있다.
그것이 일상인가?

욕구와 좌절이 동시에 현존하는, 그것도 동어반복되는.

나는 화면 안에서 부러진 날개와 날아가는 날개를 동시에 보며 발길을 옮겼다.

황주리 그림을 직접 보니 원고지에 색칠을 했다.
여러 조각들이 모여진 그림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면 그냥 어린아이가 색칠놀이를 한 것 같은데
점점 멀어질수록 형체가 보인다.

박수근 그림은 놀랍고 황망했다.
'나목'이 왔더라면 했지만, '할아버지와 손자'라는 그림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많은 터치들이 꿈틀거린다.
이 그림도 점점 멀어져야만 빈곤의 삶과 무한한 애정이 보인다.

황주리는 가까이서는 어린아이의 동심을, 멀리서는 어른의 아픈 기억을,
박수근은 가까이서는 화강암의 거친 질감을, 멀리서는 그 아픔을 아우르는 동심을
내게 전한다.

사는 것도 그렇겠지.
점점 멀어져서 거리를 두고 물러나야만 뭔가 보이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대원사로 향했다.
늦게 출발한 터라 그리고 미술관을 들른 터라
모악을 오르는 길에는 모두 내려오는 이들 뿐이다.
문득 삶을 거스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 또한 분명 오르고 나면 내려올 것이니 생각하며 씩씩하게 걸었다.

대원사 오른쪽 행랑 마루, 자리를 얻어 큰 숨을 쉰다.
가져간 커피 한 잔을 먹고 나니 옆 사람이 보인다.
커피를 나누고 나니 금새 말문이 트인다.

때론 아주 작은 것, 그것이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그때서야 내 시야에 천 원 짜리 가득한
지진 해일 이재민 돕기 모금함이 보인다.
그보다도 그 옆에 다소곳하게 자리한 보온병과 종이컵이 내 시야를 자극한다.
나는 그 마음이 즐거워,
차는 마신 터라 사진 한 장을 찍고 천 원 한 장을 넣고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 나는 힘이 솟는다.
그래서 뛰어 내려왔다.
나의 일상이 그렇게 갔다.

05. 01. 23 然

p.s. 한국현대미술의 단면전 -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명품 선
- 일시 : 2005년 1월 21일 ~ 2005년 2월 20일
- 장소 : 전북도립미술관(모악산도립공원단지 내) 222-0097 www.jbartmus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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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을 다녀와 쓴 글입니다.
현대미술전에 관한 얘기라기보다는
미술관으로 가는 길 이곳 저곳의 풍경을 적었습니다.
그 느낌을 전하면 좋겠네요^^
http://www.jlife.co.kr/Jlife_Board/theme/Simple/list.jsp?current_page=1&dbname=lifeMov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