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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출신,세계적,유명동양화가, 월북미술대가,정창모의,역사,그림,인생을,소개한다.
오태규 | 2013-08-12 | 조회 10279

전주출신,세계적인,동양화가,월북작가,정창모,화백의,미술,역사,인생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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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모..동양화가는?...그이름이...세계적으로..알려진...유명한분이다.

정창모의 그림은?...동양화가..역사에...영원히...남을..유명한것이고...작품도..3000여점에 이르고...국보급작품도...수없이많다...이런..세계적으로...유명한...동양화가의

고향이...전주이고...전주에서...동양화의..천재적인...가문의..재능을받아서...대성하였으니...

전주의 자랑이고...전북의자랑이고...전북도립미술관,의...자랑거리가...될수있다.

정창모의 동양화을 전시한다면?...수많은..관광객들이... 찾아 올것이다.

전북지역과,전주관광자원으로...너무도 훌륭한...자랑이고...자료..라볼수있다.

현재..한국에..전국에...자기고향사람...유명한...예술인을...모시고...전시장...만들어서

지역..자랑거리로..만든곳은?...수없이 많다...이런점에서...전북과,전주의자랑..전북도립미술의 자랑.으로...손색이없고...찬양할만하다..그러기에...정창모화백의...동양화전시..와...정창모화백미술관,이나...기념관을만들면...크게...성공할수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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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을들면...전주보다도큰...서울시와...인천시에서도...전람회을... 대대적으로...하면서...

정창모화백의...동양화예술을...남북화합차원에서..칭찬하고..찬양하면서..대규모..전시을..하고있다...

그,증거가...다음의글에서..알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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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는 6.15 남북공동선언 13주년과 정전 60주년을 맞아 북한 인민예술가 선우영, 정창모 작품전을 7. 18 ~ 7. 27일까지 인천아트플랫폼에서 개최한다.

<남북평화 교류협력의 전진기지> 인천시는 경색된 남북관계 속에서도 다양한 남북교류협력사업의 지속적인 추진을 통해 서해평화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한 시민 공감대 형성을 위해 노력해 왔으며, 올해는 정전 60년을 맞아 시민과 함께하는 다양한 문화예술행사를 마련했다.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 인천시청,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인천아트플랫폼 등에서 평화콘서트, 전시행사, 시민참여행사, 학술회의 등 다채롭게 구성했다.

이번에 전시되는 북한 인민예술가 선우영 화가는 북한의 진채세화(眞彩細畵)의 대가로서 세밀화 기법을 위주로 한 주제화와 풍경화에서 진지하고 섬세하며 생동적인 화풍을 펼쳤으며, 기존의 동양화에서 꺼리던 채색을 과감히 도입하는 등 작품에서 독창성을 보인 화가이다.

또한 정창모 화가도 북한의 대표적인 인민예술가로서 윤곽을 그리지 않고 먹이나 물감을 찍어서 한 붓에 그리는 화법인 몰골화(沒骨畵)의 대가로 풍경화 뿐만 아니라 화조화, 인물화, 정물화 등 조선화의 각 장르와 미술 이론에도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선우영, 정창모 화가의 작품 대부분은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어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지난 2005년과 2006년 중국 베이징 국제미술전에서 최고의 상인 금상을 수상하여 국제무대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선우영 화가의「구월산 오봉」,「해금강의 아침」등 10여점과 정창모 화가의「보덕암의 가을」,「연꽃」등 10여점이 전시되며, 북화의 강한 발색과 거칠고 힘 있는 기운 그리고 남북분단이라는 시대적 운명과 싸우며 치열하게 예술혼을 불살랐던 북한 조선화 거장들의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인천시는 2011년부터 ‘분쟁의 바다를 화해의 바다’로 만들기 위한 ‘인천 평화 미술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예술을 통해 평화담론을 만들고 확산시키는 미술로 평화를 말하는 작업들을 진행해 왔으며, 서해 평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남북한 사회문화 교류활동을 계속해서 펼쳐 나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인천시 관계자는 “본 전시회를 계기로 체제나 사상에 대한 편견을 내려놓고 북한 문화와 생활을 이해하고 대립과 갈등을 넘어 남북 7천만 국민들이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시간되길 바라며, 분단의 시대에 한반도의 문화, 역사, 유산에 대한 교류의 장을 넓히고 북한 예술에 대한 문화 해득력을 높이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 저작권자 © 뉴스타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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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세계적으로...미술로써...유명한분이...전주출신이라는것은?...전주의자랑거리이다...미래에...외국인...광광객들...중국인,관광객이나...미국인,관광객...일본인,관광객...유럽인,관광객들에게도들...자랑할수있는...인기가있는...볼거리가..될것이고?..외국인들에게...더,잘알려진...세계의 화가...정창모..동양화...미술관이...더 인기가..있는...관광지가...될수도 있다.

더욱이...정창모,화백은...고향땅...전주가..그리워서...언제나...타향살이..노래와...꿈에본,내고향...노래을...불으며...고향땅을 그리워하며...전주에...와보는것을...평생에...희망과...꿈으로...알고...돌아오지못할...분단의 아픔을...가슴에 안고서...일생동안...동양화그리기에...매진했다고...한다...이런, 한민족의...분단의아픔을...동양화의 미술로 승화시킨...예술인...동양화가...정창모의...동양화역사..전시관(전시회)을...전북도에서...전시하고...세계인들...관광객들에게...전주의 자랑거리로...전주의인물로...자랑하고...추모하는것은?...너무도 당연하고...옳바른일..일것이다.

그래서...전북도립미술관에...정창모의동양화...전시회을...추천하고...추진하는것입니다.

존경하고...훌륭한...동양화가..정창모!...그을, 추모하고...그의,넋을...달래기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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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31일....서울에서...

전주,출신...시 암, 오 태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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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전 금상수상 월북화가 저창모의/ 40점 작품| ─‥‥‥ 그림갤러리
월곡(신종태) 조회 20 |추천 0 | 2009.12.0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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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 품 명 : 칠보산 면경대의 가을 작 품 명 : 묘향산 불영대
작 가 : 만수대창작사 (인민) 정창모
작품크기 : 59cm x 97cm

작 품 명 : 태백산성의 봄
작 가 : 만수대창작사 (인민예술가) 정창모
작품크기 : 101cm*67cm

작 품 명 : 평양모란봉 청류문의 봄
작 가 : 만수대창작사 (인민) 정창모
작품크기 : 124cm x 63cm

작 품 명 : 모란봉 청류벽
작 가 : 만수대창작사 (인민) 정창모
작품크기 : 100cm x 70cm

작 품 명 : 세검정의 겨울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57cm x 110cm

작 품 명 : 봄날 작 품 명 : 석류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71cm x 69cm (약25호)

작 품 명 : 풍요한 가을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69cm x 140cm

작 품 명 : 련꽃과 물촉새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32cm x 72cm(약11호)

작 품 명 : 묘향산의 폭포구경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90cm x 63cm(약28.5호)

작 품 명 : 풍요한 대지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126cm x 57cm 약35.6호

작 품 명 : 정물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56cm x 127cm 약36호

작 품 명 : 묘향산 불영대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77cm x 56cm 약22호

작 품 명 : 국화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46cm x 129cm

작 품명 : 산촌의 정서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72cm x 54cm 약20호

작 품 명 : 향산의 가을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71cm x 53cm 약17.4호

작 품 명 : 묘향산 상원동의 봄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96cm x 60cm 약29호

작 품 명 : 축복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112cm x 63cm

작 품 명 : 금강산 보덕암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72cm x 53cm 약19.4호)

작 품 명 : 만폭동 계곡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107cm x 71cm 약37.6호)

작 품 명 : 석류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63cm x 61cm

작 품 명 : 묘향산 불영대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78cm x 64cm

작 품 명 : 달밤의 정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131cm x 64cm

작 품 명 : 풍요한 대지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132cm x 56cm

작 품 명 : 새와국화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96cm x 61cm

작 품 명 : 가을의 풍미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96cm x 58cm

작 품 명 : 금강산선하계곡여름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132cm x 65cm

작 품 명 : 묘향산상원동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115cm x 71cm

작 품 명 : 석왕사 조개문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106cm x 67cm

작 품 명 : 황해금강 장수산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125cm x 65cm

작 품 명 : 열매맺은 가을
작 가 : 국제전 금상 수상(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61cm x 41cm

작 품 명 : 소나무와 진달래
작 가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63cmx115cm

작 품 명 : 금자란
작 가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35cmx93cm

작 품 명 : 가을의 정서
작 가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132cmx38cm

작 품 명 : 비파
작 가 :국제전 금상 수상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45cmx34cm

작 품 명 : 꽃정물
작 가 : 만수대창작사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100cmx45cm

작 품 명 : 가을의 정서
작 가 : 만수대창작사 (인민) 정창모 (월북화가)
작품크기 : 140cmx50cm

작 품 명 : 묘향산 하비로암 칠성골에 물소리 높다
작 가 : 만수대창작사 (인민) 정창모
작품크기 : 135cmx65cm

작 품 명 : 백목련
작 가 : 만수대창작사 (인민)정창모
작품크기 : 120cmx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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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정창모

[ 鄭昌謨 ]

요약
북한의 화가. 화조화·인물화·풍경화·정물화 등 조선화의 각 장르 뿐 아니라 미술 이론에도 뛰어나며 100여 점의 작품이 북한의 국보급으로 인정받아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6.25 전쟁 중에 월북하였다.
  • 출생-사망

    1931.12.16 ~

  • 효원(曉園)

  • 국적

    북한

  • 활동분야

    미술(조선화)

  • 출생지

    전북 전주시

  • 주요수상

    국제미술전람회 금상, 특별상 10여 회

  • 주요저서

    공저 《화조화기법》 《풍경화 기법》 《필치론》

  • 주요작품

    《북만의 봄》(1966), 《금강산계곡》(1970), 《만경대의 봄》(1972), 《비봉폭포의 가을》(1976)

호는 효원(曉園)이다. 1931년 12월 16일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나 완산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림에 두각을 나타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인민의용군에 입대해 월북한 뒤, 1963년 평양미술대학 졸업작품인 조선화 《배머리에 오신 어버이수령님》으로 북한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평양교원대학 교원과 조선미술가동맹 현역 미술가를 거쳐 만수대창작사 조선화창작단 풍경화실 실장(1975), 공훈예술가(1977),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1980), 국가작품심의위원회 조선화부문 심의위원(1980)을 지냈고, 1989년부터 북한의 예술인들에게 수여되는 최고의 국가 영예 칭호인 인민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화조화·인물화·풍경화·정물화 등 조선화의 각 장르는 물론, 미술 이론에도 두루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3,0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그렸는데, 대부분의 작품이 부드럽고 간결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회화 기법으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1966년 제9차 국가미술전람회에 출품한 《북만의 봄》은 국제미술전람회에서 10여 회의 금상과 특별상을 받는 등 국제적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2002년 현재 100여 점이 북한의 국보급으로 인정받아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주요 작품에 《북만의 봄》 《금강산계곡》(1970), 《만경대의 봄》(1972), 《비봉폭포의 가을》(1976), 《백두산의 봄》(1977), 《금부리의 가을》(1984), 《분계선의 옛집터》(1985) 등이 있다. 2000년 8월 14일 이산가족 상봉 때 1차 상봉단의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역참조항목
김기만

[네이버 지식백과] 정창모 [鄭昌謨] (두산백과)

................. 북한의 미술] 정창모, 북한 미술계 서정적 표현의 대가북한예술/ 북한의 문화

2013/07/30 15:50

복사http://blog.naver.com/ipa1983/192144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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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모, 북한 미술계 서정적 표현의 대가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 문화교류의 문이 열리면서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분야가 미술교류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는 우리 사회에서 미술붐이 일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는데요,

자신의 집에도 보기 좋은 미술 작품을 하나쯤 구입해서 걸어놓고 싶은데,
비싼 가격 때문에 차마 구매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북한 대표 작가들의 작품이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지요.



남한에 소개된 작품들은 북한을 대표하는 작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그것과 비교하면 매우 저렴했고,
일반인에게는 왠지 어렵게 다가오는 추상 미술품들이
아닌 리얼리즘에 토대를 둔 구상작품이었다는 점이
대중들의 관심들을 불러일으켰어요.

당시 북한 미술품의 매매는 진위 여부를 포함한 여러 문제점을 산출하기도 했지만
스타 작가 또한 부상하게 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지요.


국내 시장이 가장 선호했던 작가 중 한 사람이 바로 이번에 소개할 정창모입니다.

그는 월북한 화가였어요. 물론 일제강점기에 이미 화가로서 활동하다가 월북한 화가가 아닌,
북쪽에 올라가 비로소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월북화가’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화가는 아니에요.


월북화가인 이쾌대의 경우 일제강점기 당시 명성이 월북 이후의 활동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면,
정창모의 경우에는 북한을 대표하는 화가로서 주목되기 시작했지만
훗날 알고 보니 남한 태생이었다는 것으로 알려졌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입니다.


실제 정창모는 북한 미술계를 대표합니다.
주체문예 이론 속에서 풍경화에 대한 김정일의 유명한 테제
“자연은 어느 것이나 뜻이 깊고 정서가 차 넘치게 그려야 한다.”를 잘 구현한 대표적인 작가가 정창모이기 때문이에요.

북한 미술계에서는 아무리 좋은 내용과 위대한 사상을 체현하고 있는 작품이라도
정서적으로 표현되지 못하면 진정한 예술작품이라 할 수 없다고 논하고 있습니다.

‘정서성’이 있어야 사람들의 감정에 작용하여 감상자의 정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말이지요.


이는 선전·선동을 통해 인민을 교양하려는 목적을 지닌 북한 미술의 존재의의와 직결되는 문제에요.

서정성이 잘 표현된 작품으로 북한 미술계에서는 정창모의 <북만의 봄>(1966년)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제작 당시부터 북한 미술계의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작 당시에는 주제를 뚜렷이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화면 중심에는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싸운 유격대원이 물을 마시고 있는 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고,
화면 왼쪽 위에는 숲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항일유격대원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이 부분인데, 휴식을 취하고 있는 유격대원들의 모습이 혁명의 과정에서
적극적인 활동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제작 초기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지요.


<북만의 봄>, ‘낙관적 미래 표현’ 주목 받아


그러나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은 다른 한편으론 그 동안 험난했던 삶의 모습을 내포하고 있으며,
눈 쌓인 풍경은 그들의 험난했던 현실과 가슴 아픈 희생의 숭고함을 웅변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는 시각이 이어지면서 작품에 대한 평가가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괴롭거나 절망하지 않는 미소를 머금고, 밝은 표정으로 물을 마시고 있는 말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대원의
모습이 화면 안에 낙관적 미래를 암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뭇가지에서 돋아나는 흰 눈과 새싹의 효과를 통해
희망을 서정성 있게 표현하였다는 점을 북한 미술계가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지요.

이처럼 <북만의 봄>은 화면을 보자마자 바로 메시지가 전달되는,
직접적 방식이 아닌 꼼꼼히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자연스레 풍겨 나오는 정서적 여운으로 하여금
보는 이들의 감동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이 주목되었던 것입니다.



정창모는 화조화 부분에서도 뛰어난 성과들을 만들어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다는 과업에 따라
북한 미술계가 인물화 중심으로 평가되었을 때 상대적으로 고루한 장르로 평가받았던 부분이
전통 시대에 많이 그렸던 화조화나 기명절지도 등의 정물화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에 기념비적 건축물이 많이 세워지면서 건축물 장식을 위한 미술품들이 요구되기 시작할 때
정창모는 이처럼 외면 받던 장르를 통해 성과를 내면서 미술계에 자신의 존재를 안착시켰어요.


정창모가 이러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전라도에서
일제강점기 표구를 했다는 아버지와 문인화가였다는 할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부터 전통 미술을 보고 자라났던 환경이 내재되어 있었다는 점 또한 주요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한 뿌리의 힘이었을까요.
정창모의 화조화, 기명절지도가 남쪽에 소개되자 몰골법을 다루는
그의 필력은 국내 시장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어요.



남과 북에서 사랑받던 정창모는 2010년 사망했어요.
그래서인지 통일을 염원하며 많이 그렸던
분단의 현장 <분계선>에 쓰여 있는 그의 글이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분계선. 이 땅의 허리를 갈라 지나간 비운의 철조망 우에 눈보라 싸납다.
허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 노래 부르며 통일의 봄 맞으리.”


*출처: <통일한국> 2013년 5월호 통권 제353호

북한의 예술가 선우영, 정창모 작품전기존의 동양화에서 꺼리던 채색 과감히 도입하는 등 작품에서 독창성 보여

최명삼 기자 | c1221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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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7.16 04:2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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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는 6.15 남북공동선언 13주년과 정전 60주년을 맞아 북한 인민예술가 선우영, 정창모 작품전을 7. 18 ~ 7. 27일까지 인천아트플랫폼에서 개최한다.

<남북평화 교류협력의 전진기지> 인천시는 경색된 남북관계 속에서도 다양한 남북교류협력사업의 지속적인 추진을 통해 서해평화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한 시민 공감대 형성을 위해 노력해 왔으며, 올해는 정전 60년을 맞아 시민과 함께하는 다양한 문화예술행사를 마련했다.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 인천시청,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인천아트플랫폼 등에서 평화콘서트, 전시행사, 시민참여행사, 학술회의 등 다채롭게 구성했다.

이번에 전시되는 북한 인민예술가 선우영 화가는 북한의 진채세화(眞彩細畵)의 대가로서 세밀화 기법을 위주로 한 주제화와 풍경화에서 진지하고 섬세하며 생동적인 화풍을 펼쳤으며, 기존의 동양화에서 꺼리던 채색을 과감히 도입하는 등 작품에서 독창성을 보인 화가이다.

또한 정창모 화가도 북한의 대표적인 인민예술가로서 윤곽을 그리지 않고 먹이나 물감을 찍어서 한 붓에 그리는 화법인 몰골화(沒骨畵)의 대가로 풍경화 뿐만 아니라 화조화, 인물화, 정물화 등 조선화의 각 장르와 미술 이론에도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선우영, 정창모 화가의 작품 대부분은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어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지난 2005년과 2006년 중국 베이징 국제미술전에서 최고의 상인 금상을 수상하여 국제무대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선우영 화가의「구월산 오봉」,「해금강의 아침」등 10여점과 정창모 화가의「보덕암의 가을」,「연꽃」등 10여점이 전시되며, 북화의 강한 발색과 거칠고 힘 있는 기운 그리고 남북분단이라는 시대적 운명과 싸우며 치열하게 예술혼을 불살랐던 북한 조선화 거장들의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인천시는 2011년부터 ‘분쟁의 바다를 화해의 바다’로 만들기 위한 ‘인천 평화 미술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예술을 통해 평화담론을 만들고 확산시키는 미술로 평화를 말하는 작업들을 진행해 왔으며, 서해 평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남북한 사회문화 교류활동을 계속해서 펼쳐 나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인천시 관계자는 “본 전시회를 계기로 체제나 사상에 대한 편견을 내려놓고 북한 문화와 생활을 이해하고 대립과 갈등을 넘어 남북 7천만 국민들이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시간되길 바라며, 분단의 시대에 한반도의 문화, 역사, 유산에 대한 교류의 장을 넓히고 북한 예술에 대한 문화 해득력을 높이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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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미술] 내가 만난 북 최고의 화가 정창모와 선우영

글쓴이 : 붓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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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북 최고의 화가 鄭昶謨와 鮮于英
지난 1월 중순 《月刊朝鮮》 사무실에 60대 중반의 한 신사가 찾아왔다.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인 느낌이 나는 사내였다. 그의 이름은 신동훈(申東勳). 짐작대로 한국말 표현이 서툴렀다. 그는 자신을 “미국에 사는 조선화(北畵) 전문가”라고 소개하며 봉투에 고이 접어 온 산수화 한 점을 펼쳐 보였다. 금강산의 봄을 화사하게 표현한 작품이었는데, 발색이 강하고 터치가 거칠지만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화면(畵面) 왼쪽 밑에 찍힌 효원(曉園) 정창모(鄭昶謨) 화백의 낙관이 보였다. 신씨는 “정 화백뿐 아니라 선우영(鮮于英) 화백의 작품 수백 점을 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창모의 매화

정창모와 선우영 화백은 북한의 김상직·리석호(李碩鎬) 화백과 더불어 북한의 4대 조선화(朝鮮畵) 거장으로 불린다. 조선화는 조선시대 진경산수(眞景山水)의 전통을 분단 이후 조선식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킨 장르다.

미술평론가 윤범모(尹範模) 가천대 회화과 교수는 조선화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한다.
<조선화라 함은 ‘힘 있고 아름답고 고상한 것’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기법을 특징으로 한다. 조선화의 두드러진 특징은 채색화이면서 사실적 묘사, 그러면서도 화사한 분위기를 기초로 한다.>(<風景南北 전> 해설 중에서)

2011년《르몽드》지의 일본 특파원 필립 퐁스(Philippe Pons) 기자는 <북녘의 미술가들>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북한 미술가들이 선전용 그림만 그리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그린 조선화는 암시장을 형성할 만큼 미술 애호가들을 매료시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퐁스는 “조선화의 주제는 목가적 풍경이나 동물 들이다. 중국의 서화와 비슷하나 한민족 특유의 미감을 지니고 있는 한민족의 전통적 수묵화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변용시킨 것이 바로 조선화의 특징”이라고 규정했다.

신씨는 “조선화의 거장인 정창모와 선우영 선생님은 남북분단이라는 시대적 운명과 싸우며 치열하게 예술혼을 불살랐던 인물들”이라며 “남한 화가로 치면 박수근(朴壽根)이나 이중섭(李仲燮) 정도 되는 분들”이라고 말했다.

두 작가는 북한 특유의 조선화로 2005년 제8회 북경국제미술제에서 나란히 금상을 받아 세계적인 작가로 이름을 알렸다. 우리에게는 서울, 북경, 워싱턴, 뉴욕 등지에서 가진 <조선화 전(展)>을 통해 여러 차례 소개됐다. 작년 여름에는 경기도 고양시가 <고양 600년 기념-풍경남북 전>을 기획해 이 두 화가의 작품세계를 집중 비추기도 했다.

현재 이들의 작품은 중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위작(僞作)이 돌아다닐 정도로 인기가 높다.
신씨는 “지난 20년 동안 100여 차례 북한을 드나들며 작품을 모았다”며 “조선화는 남북분단 시대가 낳은 한민족의 그림입니다. 조선화는 우리의 문화요, 역사요, 유산이지요. 저는 젊은 시절 우연한 계기로 조선화에 눈을 뜬 후 제 인생과 재산을 조선화에 바쳤읍니다. 그 덕에 북한에서 국보급으로 인정받고 있는 그림을 수백 점 갖고 있지요. 이 작품들을 평범한 제가 관리하기에는 한계가 있더군요. 국가나 기업이 보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 준다면 소정의 보상만 받고 기증하고 싶습니다.” ‘소정의 보상’에 대해 그는 몹시 부끄럽고 겸연쩍은 듯 “그동안 작품을 찾아 멀리 오가느라 경비가 참 많이 들었지요”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쯤 되고 보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신동훈씨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의 이야기를 한다.
“그림을 좋아할 뿐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어서 갤러리개업 초기에 고생을 많이 했어요. 한국화 전문 갤러리라는, 나름의 차별성을 갖고 시작한 것이라 서울을 여러 차례 왕래하며 그림 보는 안목을 키워 나갔죠. 그러다 조선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조선화야말로 남북을 하나로 이어 줄 소통 창구이자 매듭이 되리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미국인들이 잘 모르는 조선화를 다루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이듬해에 북경에도 화랑을 하나 열었다. 그러곤 조선화 중에서 최고로 꼽히는 정창모 화백과 선우영 화백의 작품을 수집하기 위해 연길, 만주, 선양 등지를 누볐다. 당시 중국에서 거래되는 이들의 그림 값은 1000달러가 채 되지 않았다. 수중에 돈이 좀 있었던 그는 닥치는 대로 이들 작품을 사들는데 이 작품들은 모두 가짜였다. 그는 “조선화 공부에 무려 50만 달러가 넘는 수업료를 치렀다”고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명 작가의 작품이 지나치게 눅은 값에 거래된다면 의심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가짜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죠. 심지어 전후(戰後) 화가로는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는 정창모·선우영 선생님의 보통 크기 그림이 1만 달러 아래로 거래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동급의 한국 작가 작품이 10만 달러 정도에 거래되고 있었으니까요.”

그는 1년여 동안 다리품 팔아 수집한 작품이 모두 가짜라는 걸 알고 불살라 버렸다. 화상(畵商)이나 소장자들은 만수대창작사에서 공수한 것이라거나 조선미술박물관에서 떼어 온 작품이라는 말로 그를 속였다. 다른 누군가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되판다면 투자금의 절반 정도는 건질 수도 있었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태워 버렸다. 그것이 작가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후 그는 작품 사들이는 데 신중을 기하는 한편 조선화에 대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평양에 들어갔다. 북한미술의 산실인 만수대창작사에 들어가 정창모 화백과 선우영 화백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그는 “북에서 비자를 쉽게 내주지 않아 1년여 동안 중국에서 쌓은 인맥을 동원해 겨우 방북(訪北)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첫 방북 때는 낯설고 두려웠기 때문에 호텔 반경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요. 이후 몇 차례 더 방북했지만 두 분 선생님을 뵙지는 못했습니다. 북측이 두 화백을 보여줄 듯 말 듯 애만 태우는 바람에 방북 횟수만 늘었죠.”

신씨가 두 화백을 만난 것은 이듬해인 1990년 봄 만수대창작사에서였다. 평양시 평천구역에 위치한 만수대창작사는 북한 내 최고 화가들을 모아 놓은 집단 창작기지다. 이곳에서는 1000명이 넘는 작가가 작업하고 있는데, 이 중 개인 작업실을 사용하고 있는 작가는 몇 되지 않는다. 그가 방문했을 1990년때는 정 화백과 선우 화백 단 두 사람만이 개인 작업실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만수대창작사에는 인민예술가나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은 화가가 100명에 이릅니다. 정창모 선생님과 선우영 선생님은 이 중에서도 특별 대우를 받고 있는 조선화의 거장들이었죠. 다른 작가 여럿이 공동으로 작업실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이 두 분은 개인 작업실이 따로 있었는데, 공간이 꽤 넓었습니다. 어림짐작으로 165m²(50평) 정도 되었던 것 같아요.”

방북 1년 만에 어렵게 만난 자리였지만 제한시간이 5분으로 짧은 데다 안내원과 지도원이 지켜보고 있어서 자세한 이야기는 나눌 수 없었다. 신씨는 두 거장을 보는 감격에 겨워 큰절을 여러 번 올렸고, 두 화백은 따뜻한 미소로 화답했다고 한다.

“우리 미술의 우수성과 더불어 두 분 선생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들인지 알려주고 싶었는데, 안내원과 지도원의 존재에 기가 죽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자칫 말실수를 했다가는 바로 추방당하거나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서였죠. 선생님들 역시 별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다만 다 알고 있다는 듯 ‘우리를 만나기 위해 여러 번 찾아온 것으로 안다’는 말씀만 하시더군요.”

두 화가 면회시간은 신씨의 방북 횟수가 쌓일수록 늘어 갔다. 그가 한국은 물론 미국과 유럽 등지에북한 미술을 소개한 것에 따른 보상이었다. 그는 “서울과 뉴욕에서 <조선화 전>을 가진 후 그에 대한 각종 방송과 신문 보도 자료를 만수대창작사에 갖다 주었더니 민족애가 있는 동포라며 (나를) 신뢰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방북 3년 후부터 면회시간을 제법 길게 주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작업하는 것을 볼 수 있었음은 물론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도 허락했지요. 덕분에 조선화의 흐름을 공부할 수 있었고, 진작(眞作) 여부를 감정할 만큼의 안목도 생겼습니다.”

그 사이 조선화의 가치는 빠르게 올라갔다. 한·중·일 중심의 아시아는 물론 미국과 유럽에서도 조선화의 독창성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가치가 올라간 만큼 위작 거래도 기승을 부렸다. 그 여파로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2000년 ‘8·15 남북 이산가족상봉’ 북측 명단에 정창모 화백이 이름을 올렸다. 전북 전주가 고향인 정 화백이 문화예술인 중심으로 구성된 북녘의 서울 방문단 명단에 든 것이다.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은 정 화백의 서울 방문에 때를 맞춰 정창모 화백 개인전을 열기로 하고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전시회는 개관 하루를 앞두고 취소됐다. 준비된 작품의 절반 이상이 위작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라는 것.

“당시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측이 전시회를 열기 하루를 앞두고 정창모 선생님께 전시회 도록을 보여주기 위해 이산가족상봉 현장에 온 것으로 압니다. 한겨레 쪽에서는 내심 자랑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정 선생님께서 도록을 펼쳐 드는 순간 큰 화제가 될 것으로 알았던 전시회는 취소되고, 주최 측은 망신만 샀지요. 정 선생님이 자신의 도록에서 절반도 넘는 작품을 골라 내며 ‘가짜’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2007년에는 한 미술품 경매 사이트에서 거래되는 조선화 중 대부분이 가짜인 것으로 추정돼 미술계가 시끄러웠다. 이미 300점씩 팔린 정창모·선우영 화백의 작품에 대해 당시 위작 의혹을 제기한 이가 바로 신동훈씨였다. 그는 이 경매 사이트에서 거래되는 작품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의심돼 두 화백에게 직접 진작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만수대창작사를 방문했다. 두 화백은 예상했던 대로 “대부분의 작품이 가짜”라고 감정했고, 그는 감정 과정을 담은 동영상을 언론에 공개했다.

이 경매회사 측은 “우리는 국내 공신력 있는 감정사에게 감정을 받고 북한 화가가 직접 자신의 그림을 확인하고 있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서 작품과 함께 공개해 왔다”며 “위작 주장은 말이 안 된다”고 반박했다. 실제로 해당 사이트에는 정창모·선우영 화백의 작업 과정이 담긴 사진들이 올라와 있는 데다 이 업체에 작품을 공급하는 곳이 민족경제협력연합회(북한의 대남 민간부문 경제협력 문제를 전담하고 있는 공식 창구)라고 공개돼 있었다.

국내 조선화 애호가들로서는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워할 만한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신씨는 “두 선생님의 작품은 북한에서도 위작이 많이 돈다”며 “조선화 전문 화상이라면 누구든 위작 여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당시의 사건은 관계자들의 양심 문제였다”고 말했다.

정창모·선우영 화백은 이제 더 이상 이승의 사람이 아니다. 생전에 친형제처럼 다정했던 두 거장은 2009년과 2010년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정 화백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린 선우 화백이 먼저 하늘로 갔다.

“선우영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뵌 게 2009년 5월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건강하셨는데, 불과 석 달 후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믿기지 않아 정창모 선생님을 찾아뵈었지요. 선생님과 저는 만나자마자 서로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안내원과 지도원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서야 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러곤 지도원에게 ‘선우 선생님 묘소가 애국열사릉이냐’고 물었더니 ‘잘 모셨으니 걱정 마라’고 했습니다.”

신씨는 벗을 잃은 정창모 화백이 걱정돼 이듬해 봄 평양을 다시 찾았다. 무슨 일인지 정 화백의 작업실에는 사람이 많았다.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 화백은 최근작 5점에 낙관을 찍어 그에게 건네며 “힘내라, 우리 그림 널리 알려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신씨는 “그게 유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해 여름 사업차 인도에 머물던 정창모 선생님 외조카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며칠 전 《흑룡강신문》을 봤는데 외삼촌 함자 앞에 고(故)자가 붙어 있다’며 외삼촌의 안부를 챙기더군요. 기자가 뭔가 실수한 것일 거라 확신하면서도 걱정이 묻어 나는 말투였습니다. 저 역시 ‘그럴 리가 없다’면서도 걱정이 돼서 곧바로 중국에 나와 있는 평양친구들에게 전화를 했고,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확인했죠.”

그해 12월에는 김상직 화백마저 눈을 감았다. 조선화 4대 화가 4명이 모두 세상을 떠난 셈이다. 그는 “한 시대가 저무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분계선의 옛집터 정창모

북한 몰골화(沒骨畵)의 일인자인 정창모 화백은 전북 전주 출신으로 6·25 당시 인민의용군으로 월북했다. 1957년 26살의 만학도로 평양미술대학 조선화 학부에 입학한 그는 졸업 후 모교 교수로 재직했고, 만수대창작사 조선화창작단 풍경화실 실장을 지냈다. 1977년 공훈예술가, 1989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으며, 2005년에는 ‘제8회 북경국제미술제’에서 <남강의 겨울>로 금상을 수상해 국제무대에서도 인정받았다. 생전에 그는 2000여 점의 작품을 그렸는데, 이 중 100여 점이 북한의 국보급으로 인정받아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진채세화(眞彩細畵)의 대가인 선우영 화백은 평양 출신이다. 그의 어머니는 유명한 수예가이자 공훈교원(功勳敎員) 칭호를 받은 노정희씨다. 그는 어머니 영향을 받아 경공업대학에서 공예를 공부하다 평양미술대학에 편입학한 후 산업미술을 전공했다. 졸업 후 중앙미술창작사에서 유화 작업을 하다 1972년부터 청계(淸溪) 정종여(鄭鍾汝)로부터 몰골화를 배웠다. 1973년부터 만수대창작사 조선화창작단에서 작업했고, 1989년 공훈예술가, 1992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그 역시 2005년에 열린 북경국제예술박람회에서 <백두산 천지>로 최고상인 금상을 받았으며 작품 100여 점이 국보급으로 지정돼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신씨는 조선화의 전설이 된 두 화백과 20년 동안 만났는데 오랜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지만 두 화백에 대한 기억은 화선지 위의 낙관처럼 선명하다고 한다.

“고향이 남한인 정창모 선생님은 남쪽으로 난 작업실 창가에 앉아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길 즐겼어요. 분계선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새들을 부러워하기도 했지요. 선생님은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화폭에 담곤 했습니다. 그 애틋하고 절절한 눈빛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셋은 종종 어울려 평양 시내에 있는 식당에 가곤 했다. 냉면이나 산적 같은 음식도 팔고 노래방 기기가 있어서 노래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두 화백은 공통적으로 술은 잘 못했지만 가무(歌舞)는 즐길 줄 알았다.

“정창모 선생님은 ‘꿈에 본 내 고향’이나 ‘타향살이’를 즐겨 부르셨고, 선우영 선생님은 ‘눈물 젖은 두만강’이나 ‘낙화유수’가 18번이셨죠. 두 분 다 민족의 애환이 담긴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간혹 눈물을 보였고, 흥이 날 때는 시중드는 아가씨 손을 잡고 춤을 추기도 했어요.”

어느 겨울에는 실컷 노래하고 귀가하던 중 정 화백이 빙판길에 넘어져 발목이 부러졌다. 신씨는 “다음 날 작업실로 달려온 사모님에게 엄청 혼이 났다”고 말했다.


선우영 칠보산의 솔바위

선우영 화백은 한국 가요인 ‘사랑의 미로’를 좋아했지만 잘 부르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노래방에만 가면 신씨에게 그 노래를 불러 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신씨는 “선생님께 감동을 주려고 열심히 연습했는데 돌아가시는 바람에 끝내 들려드리지 못했다”고 했다.

“선우 선생님을 생각하면 산책 도중 관람한 <해금강의 아침>이라는 작품이 떠올라요. 어느 볕 좋은 봄날이었는데, 선생님께서 갑자기 ‘나랑 산책이나 가지’라며 제 손을 잡고 일어나셨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작업실을 나와 산책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산책이라고 해 봐야 작업실에서 400m쯤 떨어진 미술전시관까지 걸어가는 것 정도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평화로웠어요. 전시관에 도착한 선생님은 제 손을 잡고 건물 3층에 있는 VIP 전시실로 이끌었습니다. 그곳에서 200호 크기의 <해금강의 아침>을 보고 어찌나 감동했던지 울 뻔했습니다.”

해금강의 해돋이를 담은 대작 앞에서 그는 대자연의 위대함을 느꼈다고 한다. 선우 화백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그에게 영문으로 표기한 자신의 이름 ‘SUN WOO YOUNG’을 가리키며 “내 이름에는 태양과 젊음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이 선우 화백이 신씨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신씨는 선우 화백이 떠난 후 이 말의 뜻을 곰곰이 생각했고, ‘비록 몸은 떠나지만 작품에 담은 예술혼은 영원히 빛나리라’는 뜻으로 해석했다고 한다.

신씨는 “두 선생님이 내게 엄청나게 버거운 숙제를 안겨 주고 가신 것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두 분의 작품을 모아 한곳에 잘 보존하는 일인 것 같아요. 그런데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무엇보다 가족들에게 더 이상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가 조선화에 미쳐 있는 동안 아내와 두 아들은 많이 힘들었다. 식구들은 지하실에 가득한 그림을 보며 남편을, 아버지를 원망했다. 변호사가 된 큰아들은 아버지가 없는 사이 폭우가 쏟아지면 혹여 그림이 빗물에 젖지 않을까 벌벌떨었다. 고교 교사가 된 작은아들은 남북 간의 긴장감이 전시(戰時) 상황처럼 고조될 때면 북에 머물고 있는 아버지를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도 두 아들은 그가 하는 일을 자랑스러워한다고 한다.

신씨가 지난 20여 년 동안 수집한 북화는 수백 점에 이른다. 이 작품들은 한국과 미국, 중국 등지에 보관 중이다. 그는 “자식들의 존경을 받아 기분은 좋지만 이 무거운 짐을 식구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를 보존하는 일이니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고도 했다. 좋은 기부처를 찾고 있다는 말을 그는 그렇게 돌려 말했다.

申東勳
65세. 1977년 도미(渡美) 후 워싱턴에서 사업.
워싱턴에 북한미술 전문화랑 ‘새스코갤러리’ 개관(1988), 중국 베이징에 ‘사시고(思是高) 화랑’ 개관(1989), 서울 순화동에 ‘갤러리 北’ 설립(2006).
현 조선미술협회 회장.

글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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